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느무느 Feb 18. 2023

첫 감기

11월에는 수능을 앞두고 기온이 더 내려가 수험생 가족을 두지 않은 사람들도 심리가 얼어붙곤 했었다. 나 때이야기다. 수능 추위라는 말이 무색해진 지 오래고 지난 11월도 그리 춥지 않았다. 오히려 가을에 일찌감치 차가운 공기가 감돌더니 막상 11월에는 날씨가 내내 따뜻했다. 그쯤 되자 나와 남편은 날씨 눈치를 살살 보다가 주말마다 유모차를 끌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오는데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7개월이면 신생아는 아니지만 쌍둥이 둘의 먹고 자는 스케줄을 맞춰 외출하기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아가들은 낮잠을 두 시간 간격으로 자고 밥은 네 시간 간격으로 먹었는데, 둘의 낮잠 시간과 식사시간은 매일 조금씩 달랐다. 한 명이 깨면 곧 한 명이 졸려질 시간이고, 한 명이 먹고 나면 다른 아기 먹을 차례가 다가왔다. 둘 다 산책 나갈 수 있는 ‘배부르고 안 졸린’ 상태가 되는 것은 뭐랄까. 수학 문제에 비유하자면, A는 시속 30킬로의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가고 B는 시속 10킬로의 속도로 걸어서 운동장을 돌 때 A가 10바퀴를 도는 동안 둘은 몇 번을 만나게 되는지 알아내야 하는 수학 문제와 비슷했다. 아니 이 문제보다 훨씬 골치 아픈 일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날씨, 엄마 아빠의식사시간과 생리현상, 컨디션이라는 변수까지 잘 들어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산책이나 외출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지냈지만, 마침 11월 날씨는 춥지 않았고 실내 생활도 슬슬 탈피하고 싶었다. 네 시간 간격으로 먹는 것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두세 시간 간격으로 둘을 먹이던 때는 하루 종일 먹이고 설거지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용기를 내어 짧은 산책을 시작했다. 처음엔 아파트 단지만 돌다가, 길 건너 공원도 다녀오고, 동네 작은 카페도 가보고, 조금 큰 프랜차이즈 카페도 다녀오고, 집 앞 작은 개천의 산책길까지도 나갔다. 산책 후엔 고작 몇 천 걸음 걸었다고 집에 돌아와 벌러덩 뻗어버렸다. 그래도 집에서만 보낼 때보다 주말 시간이 금방 지나가 좋았다.


그날도 오후에 아가들 밥 먹이고 나갈 채비를 했다. A와 B가 만나는 얼마 안 되는 기회이기에 마음이 바빴다. 준비를 서두르다 문득 날이 다시 추워지는 것 같은데 평소대로 실내복에 조끼만 입혀서 나가도 되려나 망설여졌다. “아가들 춥지 않을까? 옷 갈아입힐까?” 남편에게 묻자 “괜찮을 것 같은데?”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얼른 나가고 싶은 마음에 남편의 말을 근거 삼아 걱정을 다독인 게 화근이었다. 며칠 전보다 차가운 날씨에 산책 내내 마음이 초조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아가들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야 원래 자주 하지만, 코에서 맑은 콧물이 찍 내려오는 게 아닌가.


처음 보는 아기 콧물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가들이 감기에 걸려버렸다. 어른들은 패딩 점퍼를 입고 나가면서 아가는 유모차에 담요만 덮어주면 될 거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멍청하고 한심했고 경솔했다. 나에게 온갖 나쁜 말을 다 갖다 붙여도 모자랐다. 속상하고 화가 나는 와중에 내가 쏘는 비난의 화살을 혼자 맞기엔 너무 아팠다. 큰 고민 없이 그냥 나가자고 했던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에게도 동일한 무게의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어졌다. 남편을 불러우는소리를 내자 남편이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순간 내 세계관에 오류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장학퀴즈에 출전해 머리를 맞대고 A와 B에 관한 수학 문제를 풀던한 팀과 같았다. 날 안정시키기 위한 그의 위로를 듣는 순간, 우리는 나의 과실로 서바이벌에서 탈락한 팀이 되어버렸다. 크게 자괴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주눅 들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떤 과오로 인해 그와 나는 같은 죄수복을 입고 험한 교도소를 견뎌야 할 운명이었는데, 현실은 나만 죄수복을 입고 그는 면회실 유리창 너머에 서있었다. 그리곤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자책하지 말라’는 조언은 내가 잘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말이었다. 아가들의 콧물을 본 순간 이미 스스로를 부족한 엄마라고 책망하고 있었지만 내 부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위로에 내 잘못이 기정사실화되었다. 잘못된 결정에 일정 지분이 있는 남편은 어째서 나처럼 탄식이 먼저 나오는 게 아니라 이성적인 조언이 먼저 나올 수 있는 걸까. 아가들이 아픈 것이 싫은 만큼 내가 부족한 엄마가 되는 것이 싫다. 아니 무섭다. 잘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고, 아가의 감기가 그 성적표였다. 나는 왜 이런 두려움에 떨까. 두렵지 않고 아가들을 사랑할 순 없는 것일까. 아빠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가. 처음으로 아가를 안고 남편에게 성을 냈다. 당신은 왜 나만큼 괴롭지 않냐는 이상한 시비였다. 싸우는 동안 아기들은 우리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얌전히 기다렸다. 그게 또 미안해서 두 팔로는 아가를 꼭 안고 있었다.


아가들은 한 달 넘게 감기로 고생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았다. 코를 쑤시고 번쩍이는 불빛으로 목을 들여다보고 배에 차가운 청진기를 가져다 대며 자신을 괴롭히는 게 너무 분한지 아가들은 병원에 갈 때마다 앙앙 울었다. 몇 주가 지나자 아가들은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의사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나 대신 의사가 원망을 받는 게 속으론 겸연쩍었지만, 나는 아가 눈물을 연신 닦아주며 의사를 방패 삼아 원망의 시선을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가들은 병원을 나와도 서러움이 남았는지 한동안 강하게 울어 젖히더니 감기 끝 무렵에는 진료를 보고 나면 자포자기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웃겼다. 


아기가 아파서 속상한 마음이 나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연결되는 걸 보면서, 이런 게 모성애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아기 때문에 나를 조금이라도 더 미워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아기가 커서 나를 미워하더라도 그것은 너의 감정이라고구분 짓고 건강한 나로 남아있고 싶다. 엄마는 원래 그래야 한다는 건 없다. 아기들 감기가 드디어 떨어졌지만 한동안산책을 가지 못했다. 경솔하지 않기 위해 겁쟁이가 되긴 했지만 나도 죄의식에서 회복될 시간이 필요했다. 해가 바뀌고 안전하게 느껴질 만큼 따뜻해지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건만 외출 때만 되면 계속 멍이 든 것처럼 마음 한편이 욱신 거린다. 그래도 이 정도는 참을만하다. 

작가의 이전글 점이 선이 될 수 없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