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좀 심각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 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는 고질적인 문제임에도 완화될 기미 없이 심각해지고 있는 이 현상에 대해 사회적,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논의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세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양상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고요. 그만큼 방대하고 무거운 이야기인 만큼 이번 글에서는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다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메뉴를 정하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이미 인생난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선전날 먹은 음식과 오늘 저녁 약속에서 먹기로 한 음식을 제외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연달아 먹으면 좀 물리잖아요. 간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 했다면 밥을 먹고 남는 시간에 눈을 붙일 수도 있으니 속이 더부룩해지는 음식은 피하는 게 좋겠지요. 알레르기를 유발하거나 내 몸과 잘 맞지 않는 식재료를 고려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예전 같으면 이 정도만 염두하면 되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어느 정도의 맵기까지 감당 가능한가 ’하는 게 그것이에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요. 잘은 모르지만 불닭볶음면과 마라탕이 나오기 이전에, 동대문엽기떡볶이가 유행하면서 미친 듯이 매운맛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매운 음식을 삼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기분을 참고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오락적인 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용기를 필요로 하고 스릴을 느끼게 해 준달까요. 배달 음식을 많이 시켜 먹게 되면서 그런 것도 같아요. 기억에 남는 쨍한 맛이어야 재주문율이 높아지다 보니 매운 음식을 만드는 곳이 많아진 것 같거든요. 다 이해합니다. 저도 매운 음식을 종종 즐기니까요. 하지만 매운 음식을 먹고 싶다는 것과 매운맛을 감당하면서 먹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속에서 우리는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다른 경쟁자의 도전을 늘 경계하며 살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리고 있으면 ‘이러다 나만 뒤처지는 것 아닌가' 하고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매사에 ‘챌린지’라는 말도 잘 가져다 쓰죠. 댄스챌린지, 갓생챌린지, 만보챌린지, 그리고 블로그 주간일기 챌린지도 있어요. 불닭볶음면이 막 출시 되었을 때에는 불닭볶음면을 먹는 챌린지가 한창 유행했어요. 매일 새로운 유명인들이 불닭볶음면 먹방을 올리니 ‘나도 먹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무의식 중에 동참하게 됩니다. 일부 챌린지들은 자기 계발에서 도움을 준다고 옹호해 볼 수 있지만 점점 더 매운 것을 쫓는 것은 어떤 효용이 있을까요? 안 그래도 삶의 여러 과업을 달성하느라 심신이 피곤한데 먹는 일에서 까지 도전 정신을 발휘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다들 달리기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뛰기 시작하진 않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찌 되었든 매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미각은 이런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측하고 진화라도 한 것일까요? 웬만한 음식점들의 매운맛은 아래와 같이 5단계로 세분화되어 있거든요.
1단계: 하얀색
2단계: 약간 매운맛
3단계: 보통 매운맛
4단계: 조금 매운맛
5단계: 아주 매운맛
일단 1단계가 제일 안 맵고 5단계가 제일 맵다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2, 3, 4단계는 1단계와 5단계 사이를 정확히 다섯 등분해서 차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단계를 나타내는 숫자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약간 맵고, 보통 맵고, 조금 맵다는 정보값에 어떤 변별력이 있을까요? 매운맛을 정량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위 설명은 매운맛에 대한 정성적인 묘사일 뿐입니다.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들을 사용했을 뿐이에요. 이런 표현만으로 5단계까지 나누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3단계만 되었어도 상/중/하, 초/중/고와 같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떠올릴 수 있기에 매운맛 선택이 한결 쉬웠을 거예요.
5단계로 나뉘는 것은 스테이크 굽기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레어, 미디엄 레어, 미디엄, 미디엄 웰던, 웰던. 이것도 사실 어려운 문제예요. 얼마만큼 익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가 되다 보니 식당에서 ‘스테이크 어떻게 드시겠습니까’하고 물어오면 살짝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주로 미디엄 웰던으로 스테이크를 먹는데요, ‘오늘은 조금 덜 익힌 스테이크에 도전해볼까’ 마음먹어도 미디엄까지가 저의 최선입니다. 재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정도로 주방장이 알아서 구워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매운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스테이크를 시키는 것과 비슷해졌어요.
전통적으로 맵기를 조절하는 일은 간단하고 명쾌한 일이었습니다. 매운탕과 지리를 보세요.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돼요. 순댓국 먹을 때는 다대기를 주죠. 콩나물국밥 먹으러 가면 다진 청양고추를 주잖아요. '우린 원래 맑은 국물인데 매콤하게 먹고 싶으면 넣으라’는 거죠. 전 이 정도면 만족했어요. 그런데 오지선다라니요. 여러분은 매운 정도를 골라 주문하게 되어서 행복한가요? 고급 레스토랑에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선호하나요? 선택지가 많다고 삶이 더 윤택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이 우주가 더욱 무질서해지는, 우리 세계의 엔트로피만 증가시키는 것 아닌가요? 더군다나 정확한 정보를 담지 못 하는 ‘약간’, ‘보통’과 같은 부사만으로 매운 정도를 유추하는 것은, 마치 포커 게임의 규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내가 가진 칩을 올인해버리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매운맛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놓은 것보다 저를 더 깊은 곤경에 빠뜨리는 건 바로 ‘3단계: 보통 매운맛’에 같이 쓰여 있는 이 문구 때문입니다.
3단계: 보통 매운맛 (신라면 정도의 맵기)
제가 경험한 99%의 음식점에서 보통 매운맛을 ‘신라면 정도의 맵기’라고 표현하고 있었어요. 일단 신라면이 3단계 보통 맛이라는 것부터가 절 힘들게 해요. 전 평균, 보통, 중간이고 싶어요. 메뉴판에 보통 맛이라는 표시가 있다면 그걸 선택할 거라고요. 제 미각이 특출 난 것도 아니기에 제가 임의로 무슨 재료를 더 넣고 더 빼고 하면서 위험 부담을 안고 싶지 않아요. ‘보통’이라는 선택지는 안전하죠. 스테이크 먹을 때에도 미디엄을 자꾸 도전하려는 이유가 그거예요. 딱 중 간이잖아요. 가운데. 원래 음식점에서 조리되어 나오는 맛, 오리지널을 맛보고 싶거든요.
‘보통’이라는 말이 가진 힘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제가 ‘보통’ 10시에 잔다고 하면 여러분은 10시 10분만 되어도 저에게 전화를 걸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예요. ‘보통’은 그냥 진리 앞에 따라오는 장신구 같은 거예요. 즉 평범하고, 일반적인, 쉽게 통용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킬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라면은 매운 라면입니다. 이름에 ‘매울 신’ 자도 들어가요. ‘보통’이라고 해놓고 신라면 정도의 맵기라고 하니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통맛이라고? 근데 신라면이라고? 이런 인지 부조화를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라면은 4단계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이제 ‘신라면 정도의 맵기’라는 표현을 살펴볼까요. 저는 라면에 다른 첨가물을 넣지 않고 먹는 것을 선호합니다. 자고로 라면이란 MSG 맛으로 먹는 것 아니겠어요? 온전히 그 자극적인 조미료 맛을 느낄 수 있게 먹는 편이에요. 하지만신라면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계란을 넣어 먹습니다. 계란이 없을 경우에는 수프를 80% 정도만 넣어서 매운맛을 중화시키죠. 신라면을 순정 그대로 만들어 먹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신라면을 먹어 보긴 했지만 ‘신라면 정도의 맵기’를 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우리 모두 주문에 앞서 이 표현을 사용한 음식점 사장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라면 드실 때 어떻게 드시냐고요. “혹시 파나 마늘을 넣어 드시나요? 물을 적게 잡지는 않나요? 분말수프 80%도 3단계에 해당되나요?” 굳이 신라면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우리 모두 조금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면 정도의 맵기가 3단계가 채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음식점은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맛을 0단계라고 표기하거든요. 하얀 국물은 1도 못 되는 거예요. 너무 하지 않나요? 단계는 1부터 시작하는 건데. 0단계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거냐고요. 제가 발견한, 매운맛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특이했던 음식점 두 곳의 메뉴판을 보겠습니다.
음식점 A의 메뉴판에는 시중에 유통되는 라면이 4개나 등장했어요. 일단 앞서 ‘보통명사 신라면’ 논지에서 다룬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이 메뉴판도 해석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진라면 매운맛에 청양고추를 넣고 후추를 뿌려먹는 사람이 신라면에는 계란을 넣어먹는다고 하면 이 메뉴판의 단계는 순서가 바뀌어야 될지도 몰라요. 1단계가 되지 않는 단계도 두 개나 있어요. 0단계와 입문자 단계죠. ‘약간’ 매운 정도로는 숫자 1도 채울 수 없는 각박한 세상입니다.
음식점 B는 매운맛이 5단계도 아니고 무려 6단계예요. 여기도 1이 되지 않는(못하는) 단계가 두 개나 있는데요, 그중 0.5단계는 부연설명도 없습니다. 왜 안 알려주죠. 1단계가 되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0.5단계는 주문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4단계는 응급실입니다. 같이 밥 먹는 친구가 4단계를 주문한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이 바보야 진짜 아니야~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몰라~’ (드라마 쾌걸춘향을 모르신다면 죄송합니다.)
전 음식점 A, B 중 어디에서도 음식을 주문하진 않았어요. 매운맛을 고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이 날은 타코를 시켜 먹었습니다. 타코도 맵더라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할라피뇨만 빼면 되는 정도의 번거로움은 대여섯 개의 선택지를 해독하고 하나를 고르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매운맛이 5단계로 나뉘어 있는 세상을 경험한 세대들은 이 문제가 전혀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저는 나중에 제 아이에게 김치를 물에 씻어주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1에서 5까지의 단계 중에서 어느 정도의 맵기를 원해?” “음, 오늘은 국도 안 맵고 나물 반찬만 있으니 4단계로만 헹궈 줘.” 그날이 오기 전까지 어서 이 난제에 익숙해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매운맛을 고르느라 난감했던 적이 있나요? 아니면 응급실이든 중환자실이든 병상에 누울지라도 가장 매운 단계의 음식을 사 먹는 부류인가요? 기억에 남는 특이한 메뉴 문구가 있나요? 이 연구가 지속되려면 더 많은 정보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