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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인생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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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Apr 15. 2023

손님이 집에 왔을 때의 난제

당신은 얼마나 대범한가요? 그러니까, 집에 온 손님이 손에 큰 쇼핑백을 들고 있으면 이를 망설임 없이 아는 체할 만큼 대범한지가 전 궁금합니다. 상상해 봅시다. 현관문을 열었고 손님이 보입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그의 바뀐 헤어스타일이나 오늘의 복장에 대해서 듣기 좋은 말을 건넬 수 있겠죠. 그리고 아마 당신은 친절하게도 외투와 가방을 받아 들어서 옷걸이에 걸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 손에 있는 큰 쇼핑백은 선뜻 ‘이리 줘. 보관해 줄게.’라고 말하기 망설여지는 걸까요. 이 상상에 몰입하기 힘드신가요? 그럼 가정을 추가해 봅니다. 쇼핑백은 신발 두 짝이 들어갈 만큼 크고 고급 상점에서 포장해 온 것 같은 빳빳한 쇼핑백에 입구가 리본으로 묶여 있어요. 존재감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시 모른 척해야 하는 물건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 적 없나요?


친구 소지품에 대한 프라이버시(그가 국내로 밀반입한 마약을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은 낮겠지만)를 지켜주기 위해서라기보다 ‘혹시 저것이 나를 위한 선물인가?’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른 척하고 싶어 집니다. 빈 손으로 오라고 아무리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친구가 초대에 응하는 선물을 사 왔을지도 모르잖아요. 밖에서 만나면 신신당부할 일도 없고 친구의 소지품에 대해 이리 깊게 고찰할 필요도 없는데 집이라는 공간은 상황을 참 복잡하게 만듭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부피가 제법 되는 어떤 물건을 못 본 척, 아니면 봤어도 선뜻 아는 척하지 않죠.


이때 친구가 상황을 쉽게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빨리 공언해 주면 됩니다. 하지만 손님이 몇 명 더 온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이 선물을 같이 샀어요. ‘N 분의 1’로 비용을 정산했을 거란 말이에요. 그럼 이 선물을 운반한 친구는 또 갈등에 빠집니다. 지금 이 선물을 전달해 버리면 서프라이즈 선물에 대한 최초의 리액션을 혼자 보게 되기 때문이지요. N 분의 1 세계는 냉정합니다. 고맙다는 말도 N 분의 1로 들어야 되어요. 나 혼자 생색내는 건 무리의 우정을 지키는데 좀 위험하죠. 여러분도 이 친구의 입장이 분명 이해가 될 겁니다. N명이 모두 모일 때까지 누구도 선물을 아는 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N번째 인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이 선물은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N 분의 1 제1법칙: 돈을 쓴 N명이 한 자리에 모일 때까지 N명의 비용으로 구입한 선물은 수령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N 분의 1은 물리학도 선행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아름다운(눈에 안 보여서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쇼핑백은 애매하게 집 한 구석에 놓이게 됩니다. 친구는 나름 눈에 안 띄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놓았지만 그는 집 구조에 익숙하지 않잖아요? 화장실로 가는 통로라던가 내가 핸드폰을 충전해 두는 콘센트 옆에 두었어요. 하지만 나에게는 계속 안 보입니다. 안 보여요. 친구의 페디큐어까지 아는 척했어도 이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예정된 손님들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이제 전 난데없는 메쏘드 연기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아직입니다. 아무도 저 쇼핑백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아요. 그들은 타이밍을 재고 있습니다. 선물을 준비한 데에는 사연이 있는 법이지요. 시시콜콜한 대화가 종료되고, 혹은 배달음식이라도 주문이 끝나고, 혹은 밥을 다 먹고 차분히 차를 마실 때나 되어서 공개하고 싶은 거예요. 언제까지 화장실 가는 길에 발에 치이는 저 쇼핑백을 모른 척해야 할까요.


이제와 내가 먼저 아는 척 하기엔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아까 친구 페디큐어를 언급할 때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어요. 그래도 이 정체불명의 물건과 눈치 싸움을 끝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가요? 입을 떼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세요. 만약 저 물건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요? 친구가 등장한 순간부터 이 물건을 외면하려고 했던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예의 바르기 위한 거였습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가져왔어!’ 하고 화들짝 놀라며 기대하지 않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우리가 먼저 아는 척하게 되면 친구가 지참한 물건을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고, 선물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마음에 대한 진정성을 주장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여태껏 참았는데 이제와 오해를 살 순 없지요. 


모임이 시작된 지 한참 되었어요. 이쯤 되면 저 아름다운(여전히 눈에 보이진 않지만) 쇼핑백은 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친구가 우리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자기 자신을 위한 선물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요. 그는 조금 일찍 출발해 쇼핑을 하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약속이 두 탕일 수도 있어요.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한 선물인 거죠. 이것도 아니면 친구가 우리 집에 오다가 받은 선물일 수도 있어요. 경우의 수는 많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나와 상관없는 물건일 가능성이 더 커 보여요. 제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던 게 뜨끔하네요. 그런데 잠시만요. 나와 상관없다면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 수도 있었던 거 아닌가요. 망했네요. 


상상을 이제 마무리해 볼까 합니다. 그거 아세요? 친구 생일이 오늘인 거예요. 내가 까먹었어요. 그의 애인은 하필 오늘 출장을 떠납니다. 생일을 함께 보내기 어렵게 되자 애인이 친구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선물을 준거죠. 이 쇼핑백이 바로 그 선물이었습니다. 애인에게 멋진 선물을 받았는데, 게다가 오늘이 생일인데 나는 여태껏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어떻게 예의 바르게 받을 것인가’하고 고민하느라 말이에요. 이 시나리오는 파국이네요. 전 단지 적절하게 행동하고 싶은 거예요. 손에 있는 그 물건이 제 것인지 아닌지만 알면 가능했어요. 제가 너무 과대망상 이라고요? 다음번엔 제가 당신의 집으로 방문하겠습니다. 오른손에는 식재료와 생필품이 담긴 쓰레기 종량제 봉투가, 왼손에는 향이 좋기로 유명한 브랜드의 바디워시가 있어요. 제가 당신에게 말합니다. “널 위해 준비했어!” 저는 어느 쪽 손을 내밀었을까요? 고심하지 않은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삶은 이렇게 어렵고 우리는 대충 살 수 없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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