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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Jan 15. 2024

주머니 속의 장르 15

완벽함과 꼼꼼한과 허당

일요일 아침 비가 내리더니 이내 팝콘 같은 눈으로 변합니다. 오후에나 나타날 줄 알았던 수잔이 이른 아침에 중장비를 들고 와서 선반을 달아줬어요. 커다란 수평기를 대고 위치를 확인한 후 콘크리트에 구멍을 내고, 나사를 고르고, 전동드릴을 컨트롤하는 수잔이 터프함, 완벽함과 꼼꼼한과 허당을 적당히 구사하며 완성된 2단 선반은 무인양품처럼 단아함을 뽐냈습니다. 선반 위에 마른 컵을 올리고 수연이 준 빨간 법랑 주전자를 올려놓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아내는 정신없이 뻗은 몬스테라의 줄기를 마끈으로 엮어 통로를 쾌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미관상으로도 돋보이는 감각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싱크대 위 조잡한 물건을 치웠습니다. 그것들이 사라지니 실내가 더 밝아지는 인상이었습니다. 수잔은 돌을 그리며 일기를 씁니다. 그 일기를 인스타그램에서 봤어요. 일기에 '그래서 사장님 일을 자기 일처럼 하는구나'라는 글이 있었어요. 왜죠? 조금 더 친절하게 알려줘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도와줘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자꾸만 이사하고 싶어지면 어떡하죠?


일요일 오후 손님이 많지 않아 스토너의 후반을 모두 읽고 책장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수채화 도구를 꺼내어 색들의 조합을 알아봤습니다. 살색계열의 노란색에 코발트블루를 약간 더해 표현할 수 있는 색을 알아봤다고 하면 너무 전문가 같아 거짓말이고 오늘은 물의 양을 실험해 봤다고 해도 거짓말입니다. 일단 한 번 그려보자라는 마음으로 스웨이터를 입고 목도리를 한 그림을 그려봤는데 의외로 빨리 그렸을 뿐 그림은 멸망했습니다. 완성을 하고 날짜를 기입하니 그림은 조금도 나아 보이지 않고 멸망 그대로였습니다. 그림의 뒷면에 스웨터를 대충 입은 여인이라고 제목을 달고 수채화 체험 첫날을 마감했습니다. 이래서 과연 머릿속 그림과 실제 그림의 간격이 좁아질까요? 수채화 좀 배워둘걸 그랬습니다. 



김택수

instar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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