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아련함
아침에 일어나서 지쳐 잠들 때까지 그림만 그리는 날들이었다. 집이 일터이다 보니 밖에 나갈 일도 없이 눈뜨자마자 대충 씻고 책상 앞에 앉아 꼬박 하루 종일을 그렇게 보냈다. 연말이라 그런지 그런 급한 일들이 많다. 일정을 왜 그렇게 밖에 잡을 수 없는지 불만이 생기기도 하지만 '을'도 아닌 '을'에게 의뢰받는 '병'의 입장인지라 딱히 말할 것도 없이 '을'도 죽을 맛이겠다 하고는 마감일에 맞추려 그냥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빡빡한 일정에 할 수 있을까 싶었던 일이 드디어 끝났다. 마감일에 정확히 맞춰 뿌듯하기는 하지만 하염없이 지친다.
여하튼 이렇게 몇 주를 보내기 전 잠시 다녀왔던 부산의 사진들을 이제야 꺼내 보고 흰여울길에서의 추억이 담긴 그림도 그렸다. 여행이라기보다 친구가 참여하는 행사를 도와주자는 이유였는데 살면서 부산은 처음이었다.
말로만 듣던 광안대교, 해운대, 태종대도 보고 조개구이와 문어도 먹고 투박하지만 정겨운 부산 사람들도 만났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과 일에 지쳐있었는데 그런저런 부산의 추억을 떠올려보니 기운이 좀 난다. 그래서 내친김에 다음 여행도 생각했다. 내년에 좀 길게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년 일정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하고 그래도 50일 정도는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버렸다. 사실 마음속으로 조금 망설이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일에만 시달리는 몇 주를 보내고 나니 망설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어지고, 당연히 떠나야 한다는 단단한 결심만이 남았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나니 벌써 여행이 시작된 듯 마음이 설렌다. 아직 몇 달이나 남아 있지만 하나 둘 준비할 것들이 생각나 마음이 두근거리고 기대가 된다. 이래서 여행을 떠나나 싶다. 텔레비전 속 그 많은 여행 프로그램이 이래서 생기나 싶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떠나기 전의 설렘과 돌아온 후의 아련함은 마음에 큰 위로와 버틸 힘을 주니까 말이다. 그건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