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세계의 비망록
비망록 Vol. 0 내 두려움에 대하여
by
Illy
Mar 25. 2023
아래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교포 3세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24년을 일본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언니, 동생 모두 지금도 일본에서 살고 있다.
나는 8살 때 처음으로 재일교포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접했다.
일본 버스 내부 참고사진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는 혼자 버스를 탔다.
거기서 지팡이를 든 70대쯤 보이는 할아버지가 내 이름표를 보고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의 지팡이는 나를 향해 있었고 그걸 보는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따지지도 나를 지켜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때까지 할아버지는 나를 째려보며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안에 크고 깊은 두려움이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그날은 많이
울었고 엄마한테 가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무엇이며 재일교포란 무엇이며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엄마는 재일교포의 역사 등을 설명해 주며 최대한 침착하게 사실만을 알려주었고, 나도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안전한 곳이 아님”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되었다.
8살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일이었다.
※굳이 쓰지 않아도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든 재일교포나 재일 외국인이 이런 경험을 하는건 아니고, 당연히 모든 일본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있는건 아니다.
내가 세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차별 주의자 중 한 명을 우연히 만났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일 관계상 재일교포를 공격대상으로 생각하거나, 공격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은 아쉽게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때부터 나는 태어난 곳으로 인해 위험한 경험을 하게 되는/되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나 난민들이 되었다.
그 들에 대한 가슴 아픈 뉴스를 접하게 되면 어떤 배경이 있는지, 왜 비극적인 일이 생기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런 뉴스들에서 보이는 인간의 잔인함과 탐욕스러움에 싫증이 나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까 하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해서 지나갈 수는 없었다.
이미 “세상에는 이런 무서운 일이 있다”는 사실이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는지 알아야만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런 여러
사건이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고 해도.
일종의 마음의 준비인 셈이다.
나에게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 대비가 쓸데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언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대비가 중요하고 대비의 구체적인 방법 중 하나로 “올바르게 두려워하기”가 유효하다고 믿는다.
두려워해야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고 피해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쓰면서도, "아는 게 힘이다"를 전적으로 믿고 있어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큰 힘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토록 많은 비극들을 경험하고 나서도 전쟁은 일어나고 있고, 많은 아이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당해도 학대 사건은 일어나고 있는 것만 봐도 이 의구심이 드는 것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비극적 사건의 직접적인 억제제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잠시 한 걸음 멈춰 서서 미래를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되지는 않을까.
적어도 나는 과거의 사건이나 작품들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콘텐츠 천지인 일상생활에서 전쟁과 관련된 콘텐츠를 접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감상하고 소화하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콘텐츠들 중에서 전쟁 관련 작품을 선택할 일이 많지 않을 수 있다.
창작이 아닌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나 접근하기 어려운 강의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다양한 사건과 그 배경에 대해 가능한 한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글을 써보고자 한다.
또한 전쟁과 관련된 문학이나 영화에 대한 리뷰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주제들을 던져보고 함께 생각하고 싶다.
잊지 말아야 할 일도 결국 잊고 마는 게 인간이니 하나씩 비망록을 쌓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keyword
두려움
에세이
경험
23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새 댓글을 쓸 수 없는 글입니다.
Illy
직업
프리랜서
역사 이야기와 일상 이야기, 내 "두려움"이야기.
구독자
86
제안하기
구독
비망록 Vol.1 키엘체 포그롬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