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날의 꿈(2)

모든 만남에는 이유가 있다

by 흐를일별진



- 1 -


아침이 되니 내가 달라져 있었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열병은 단 하루 만에 완치돼 버렸다.

나는 내 손을 떠난 일에는 미련을 갖지 않았다. 만남에 최선을 다했고 마음을 전할 만큼 전했으니, 이제 남은 건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했고, 늘 그랬듯 최악을 상상하면서 한 칸씩 마음의 빗장을 쌓아 올렸다.

그 친구의 다양한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면, 애써 모른 척했던 모습들까지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에 대한 호감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이란 완벽할 수 없고, 그에게는 내가 존경할 만한 구석이 명확하게 있었으니까. 다만 폭죽처럼 타오르던 감정이 잔잔한 불씨로 줄어든 것뿐이었다.


나는 사귀지 않는 사이지만, 호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 선을 찾지 못했다. 궁금한 게 있어도 묻지 못했고,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는 그를 지나치게 배려했다. 만났을 때는 불도저같이 마음을 표현하던 나였지만, 메신저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빗장을 쌓는 건 허무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연락이 반갑지 않았다. 나는 고백에 대한 대답이 듣고 싶었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남이었고 일상을 나눌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이대로 시간을 보낸다면 언젠가 마음이 통할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관계 발전의 의지가 없다면 하루빨리 끝내 주는 게 우리에게 좋다고 생각했다. 필요하지 않은 인연과 애써 대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는 거니까.


남녀 관계에 있어 고민이 길어진다는 건 스스로 확신이 없거나,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기준을 두고, 상대방을 재는 중이라는 걸 의미했다. 나는 누군가의 시험대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그의 고민이 후자를 의미한다면, 내 진심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 2 -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 수필집을 계획한 건 제법 오래전의 일이었는데, 몇 년째 제대로 시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정의 혼란이 제자리를 찾고 나니, 약속된 것처럼 머릿속 생각들이 하나로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단 하루 사이에, 나는 50개가 넘는 원고 샘플을 만들어 냈다. 생각이 넘쳐나고 손가락이 움직여서 잠을 잘 수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흡사 신이 내린 것처럼 나는 미친 듯이 글을 써댔다.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을 보면 여 주인공 유미가 남자 친구였던 바비와 헤어진 후, 갑자기 작가로서의 역량이 폭발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날 내 모습은 유미와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유미는 마음이 통했고, 나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그날부터 나는 글에만 집중했다. 어떻게 연재를 하고 어떻게 출간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원고를 쓰고 수정을 반복했다.

그 와중에 나는, 그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연락이 온다고 해도, 어쩐지 나와 비슷한 마음일 거 같아서 쉬라는 말로 대화를 중단하기도 했다.

순간의 우선순위가 글이 되니까, 점점 더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중에는 그와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가 관계를 정리해주길 바랐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먼저 관계를 끝내도 됐었다. 식어가던 마음이었기에 누가 끝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움직이지 못했던 건 미련 때문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고.



- 3 -


결과적으로 우리는 끝이 났다. 나는 불꽃처럼 타올랐고, 그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내게 남기고 간 건 한여름 밤의 꿈처럼 환상적인 것들이었다.


그와 만날 때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이 만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랑 내가 만난 거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최소한 나는 이유를 찾았다. 그는 나에게 ‘스위치’였다. 게으르고 생각만 하고,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던 나를 움직이게 만든 사람이었다.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내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원했던 정서적인 교류가 어떤 거였는지. 그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나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게 된 거였다.


무엇보다 그 친구를 만났기 때문에 지금의 에세이를 쓸 수 있었다. 위협적인 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가 잔잔한 것처럼, 나 자신을 위협했던 감정의 동요가 끝나니 내 인생을 글로 남기고 싶어졌다. 그 사람은 나에게 태풍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다만 아쉬운 건, 그에 대한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거다. 너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누군가를 움직이게 할 만큼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는 걸 말해주지 못한 것.

미안함이 있다면, 그 친구는 우리의 만남을 통해 얻은 게 없을 것 같아서 조금 신경 쓰일 뿐이다.



- 4 -


내 여름날의 꿈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불도저 같았던 내가 후회되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모습이 진짜 나인 것 같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열린 마음을 제어하기 힘든 사람.


다시 돌아간다 한들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인정하긴 싫은데, 첫눈에 호감이 가버린 생에 첫 케이스였다. 아마 다시 돌아가면 불도저 두 대로 그 친구를 튕겨내지 않았을까? 차라리 여기서 끝난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그 친구와 나는 만날 인연이 아니었던 것뿐이다.


언젠가는 내가 불도저처럼 마음을 밀었을 때, 고스란히 흙이 되어 쌓여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나의 진심을 더 큰 진심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은 그저 이 편안함을 즐기면서 글 쓰는 일을 이어가고 싶다. 역시 마음이 널뛰지 않으니까 이렇게 행복하구나.





안녕. 고마웠다. 나의 여름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