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날의 꿈(1)

나를 잃어버린 소개팅

by 흐를일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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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애가 끝난 후, 나에게는 몇 번의 연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 기회는 손에서 빠져나갔다. 첫 번째 연인의 잔상 때문일까. 나는 다가오는 사람에게서 어떠한 만족감도 느끼지 못했다.

결국 연애 실패의 원인은 내 문제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열리려 할 때마다 번번이 그의 단점을 찾아내고 뒷걸음질 쳤다. 보지 않으려 해도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한 번 눈에 띈 나와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첫 번째 연인만큼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내가 원했던 건 정서적인 교류였다. 배울 점이 있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길 원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부분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 정서적인 교류가 없는 사랑은 허울뿐인 열정과도 같았다. 그러니 모든 게 맞춰지지 않는다면 굳이 연애라는 걸 하면서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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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그 더위가 사람들의 연애 세포에 불을 지른 건지, 유독 비슷한 시기에 친구들이 사랑을 시작했다. 포항 본가에서 올라와 안정을 찾은 나도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연애가 아니어도 되니,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처럼 마음이 동해서 그랬던 걸까, 얼마 후 한 사람을 만났다. 대화를 나누고 약속을 잡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 모든 과정이 평소의 나와 달리, 뭔가에 홀린 것처럼 빠르게 이어졌다. 상황이 신기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나는 방송 작가였고, 직업 특성상 타인을 판단하는 게 빠른 편이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나와 맞는 사람일지 안 맞는 사람일지를 말과 행동을 통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관계에 있어 답답한 걸 싫어하는 편이라, 한 번 고삐가 풀리면 스트레스를 받기 전에 모든 걸 결정하고 끝내버리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그 사람의 단점이나 나와의 차이점을 단시간에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꽁꽁 닫혀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문은, 그 친구를 만나자마자 활짝 열려버렸다. 솔직히 거의 부서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당황스럽고 무섭기까지 했다.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마음이 열려서는 안 됐다. 내 기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외형적인 스타일이 괜찮다고 해서, 속까지 괜찮은 건 아닐 거라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우리는 커피를 마셨고 영화를 봤으며 다시 허브차를 마셨고, 마지막에는 재즈 공연이 한창인 작은 바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그의 허점을 찾지 못했다.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그만큼 그와 보내는 모든 시간이 만족스러웠으니까.


그 친구의 웃는 모습이 좋았고, 나를 보는 눈빛이 새로웠다. 동그란 안경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친구였고, 누군가의 말을 재촉하지 않고 들어주는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 친구는 아는 게 많았다. 물론 깊이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만남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했고, 홍콩 영화를 즐겨 봤으며 특히 무간도는 몇 번을 봐도 재밌었다고 했다. 주성치 이야기가 나오자 나에게 서유기 시리즈를 추천했고, 그 외에도 자신이 감명 깊게 본 영화를 알려주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대다수의 남자에게는 허세가 있었다. 자신의 정보력이나 취향을 과시하며, 타인을 가르치려 들었다. “내가 너보다 아는 게 많다”는 걸 내세우며 대화의 우위를 선점하고자 하는 거다. 문제는 그 모든 의도가 눈에 훤히 보였다는 거지만. 그러니 나는 남자의 허세를 격하게 싫어했다. 조금이라도 그런 낌새가 보이면 시작도 전에 상대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자신이 아는 걸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서로의 취향을 공유했을 뿐, 우리는 끝없이 취향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첫 연애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와 정서적인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나의 평정심은 얼마 못 가 무너지고 말았다. 대화하면 할수록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그 친구를 더 보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충격적인 건 결혼을 한다면 이런 사람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거다. 아니지, 생각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돌멩이로 머리를 치듯 쾅 하고 갑자기 떠올랐다. 절대 자의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완전히 가루가 됐다. 횡설수설했고 손짓이 과해졌다. 그런 나를 알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오늘의 소개팅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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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되자마자 후회했다. 차라리 만나지 말걸. 한없이 편안하게 지냈던 내 일상이 완벽하게 깨져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심장이 뛰어서 자지도 못했고, 먹지도 못했다. 열병과도 같았다.

열병을 앓음과 동시에 나는 내가 싫어졌다. 고작 한 번 만난 사람에게 마음이 열려버리다니. 확실하지 않은 관계 때문에 끙끙거리는 나에게 짜증이 났다. 마음이라는 건 쌍방으로 오가야 하는 건데, 원맨쇼를 하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제어하고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하듯 3~4번은 보면서 상대를 천천히 알아가야 한다고 세뇌했다. 하지만 그건 머리의 말이었고 마음은 완전히 따로 놀았다. 단 1%도 이성의 말은 세뇌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그가 추천한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영화가 끝나면 어김없이 그가 생각나서 힘들어졌다. 그의 사소한 일상 연락에도 마음이 들떴고, 답장하는데도 한참을 고민했다. 정말 바보 같았다.


생각해보면 나의 처음은 상대방이 먼저 나를 좋아해 주고 고백까지 해준 케이스라, 이 정도의 동요를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이후에도 물 흐르듯 감정에 빠져들었지 폭포에 쓸려갈 일이 생길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서른셋에 별일을 다 겪는다 생각했다. 그동안의 나는 스스로가 참을성이 많고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본능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결국 감정을 주체 못 한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에게 두 번째 만남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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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두 번째 만남을 결단의 날로 생각했다.

지난 일주일이 너무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을 식히기에는 일주일이 적당하다 생각했다. 이성에 대한 호감이란 것도 첫 느낌이 가장 정확하다 믿었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만난다 한들, 아닌 감정이 좋게 바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확실하지 않은 일에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 일방적인 감정을 키울 수는 없는 거니까.


마음과 달리, 나는 두 번째 만남에서도 객관성을 잃었다. 부끄러워서 그 친구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마음속은 야단법석이었다. 다시 본 그 친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나는 감정을 다잡으려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외쳤다.


‘정신 차려. 오늘 보고 아니다 싶으면 빨리 끝내 버리자’

‘끝내더라도 네 마음은 이야기해. 네 감정에 충실 하라고. 최소한 표현은 하고 도망가야지. 이대로 끝나면 후회할걸?’

‘확실하게 마음을 전해. 그래서 선택권을 넘겨. 그래야 편해’


모른 척 만남을 이어가는 것과 불확실한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 나는 두 가지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무것도 해 보지 않고 도망쳤겠지만, 그 친구를 만난 후의 나는 평소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 역시나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덜컥 용기를 냈다.


저녁 식사에 맥주를 곁들이면서 모든 마음을 쏟아냈다.

너와 만난 후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는 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고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는데, 너는 어떤지 궁금하다고,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음을 전했다.


물론 그 무렵 진짜 내 속마음은 이랬다.

‘내 마음은 지금 이래. 부담스럽지? 그럼 끝내 줘. 더는 못하겠어.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일에 시간 쓰기 싫어. 다시 평정심을 찾고 싶어. 만날 거야 말 거야 결정해. 지금 보고 아니면 어차피 한 번 더 봐도 아니야.’

지금 생각해보면 불도저처럼 그를 밀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무섭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맘처럼 되는 게 아니었고, 나는 끝까지 마음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는 말해줘서 고맙다며 웃었고, 나와 보내는 시간이 즐겁기는 하지만 아직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으니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드디어 문제가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만남을 즐겼다. 저녁을 먹고 장소를 옮겨 칵테일도 한 잔씩 나눴다. 그와 있는 시간은 변함없이 즐거워서 나는 내가 고백을 했다는 사실까지 새까맣게 잊었다.



신기하게 두 번째 만남이 끝난 그 날은 심장이 뛰지도 않았고,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상태로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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