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디카에서

복불복의 여유

by 흐를일별진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반가량.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일만 했다. 내 감정을 추스르며 자리잡기도 벅차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고 좋아하는 영화도 안 봤다. 뭔가 아무것도 못할 만큼 바빴던 건 아닌데, 일 외의 감정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10년 된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면 카메라가 고장 나 어쩔 수 없이 꺼낸 거긴 한데, 생각보다 그 결과물이 놀라웠다. 초점도 색감도 복불복인데 가끔씩 상상도 못 한 느낌의 사진이 나와서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더라.


초점이 나간 바다 사진.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는데 문득 지난 한 달 반이 떠올랐다. 난 뭐가 그렇게 여유가 없었던 걸까. 진짜 여유는 이렇게 사소한 순간에 오는 건데, 난 뭐가 그리도 벅차서 주변 모든 걸 차단하고서 일만 했던 걸까. 눈 양 옆을 가리고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경주마처럼. 내가 어디서 뛰고 있는지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가는지, 근본적인 목적성을 잊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솔직히 나의 경우엔 타이밍이 맞아 그랬던 거지 보통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 드라마의 기회. 누군가는 간절히 갖고 싶어 했을 내 자리. 그래서 어떻게든 날 뽑은 사람들이 후회할 일은 없게 하고 싶었다. 꿈꾸는 사람이 많은 데 그 자리를 차지하고선 대충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한계치까지 나를 몰았고, 끙끙거렸고, 가끔 모든 상황이 버거워질 때면 이곳에 글을 썼다. 힘들다 어떻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생각은 못했다. 어차피 내가 할 말도 그들이 해 줄 말도 정해져 있으니까. 내 감정은 내가 추스르는 수 밖에는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게 최선이다.



10년 된 디카가 내놓은 결과물이 복잡했던 내 머릿속을 깨끗하게 지웠다. 짧은 순간이었다고 해도 지금 내가 이 선택을 하기까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새로운 길에 들어섰는지,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 건 분명했다.

아마 이 글을 끝내고 나면, 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모든 걸 막아 설 게 분명하다.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일 뿐 근본적인 나의 스타일은 어디 가지 않을 거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게 있다면 쌓였던 게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니 다시 쌓이기까지 버텨낼 유예기간이 늘어났다는 것 정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