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한 남자와 두 번째 이혼을 말했다

8. 민희와 나

by IlOB

딸은 엄마에 감정전의가 쉬운 존재다. 자매도 그렇다고 한다. 내 경우엔 일찍이 엄마의 상황에 공감하며 착한 딸 콤플렉스에 걸려 있었는데 몇몇의 고집을 피우는 것 외엔 대부분 엄마의 말에 순응하고 눈치를 보느라 애썼다. 혼자가 되면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방 한편에 있었는데 나에겐 책이 꽤 흥미 높은 안식처였다. 언니 민희는 책보다는 예쁜 걸 좋아했고 본인 꾸미는 것과 인형놀이,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쉴 새 없이 어울리는 걸 즐겼다.


반면 나는 앞서 말한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조울증에 매우 우울한 성향을 지닌 채 자랐다. 한 번은 학교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창 밖만 바라봤고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당장 창 밖으로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다'라고 말했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한 번에 나에게 집중이 되어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속내를 읽힌 이후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수업에 관심 있어 보이도록 가면을 썼다. 그때는 내 비밀이 새어나가는 일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무척 방어적이었다.


소시오패스인 아버지와 가해자인 '오빠 진일', 나르시시스트인 엄마를 제외하고도 나의 가족에는 '언니 민희'와 '남동생인 사남'이라는 피를 나눈 존재가 있다. 부모가 그렇다 할지라도 적어도 의지할 형제자매가 둘이나 더 있으니 안심을 하고 평범한 다른 집처럼 의지하고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했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스코리아에 나가겠다며 워킹 연습을 한다고 머리에 책을 올리고 일직선으로 걸음을 걷는 시합을 하던 중 언니인 민희에게 갑자기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엄마는 소중한 첫째 아이인 민희를 살리기 위해 동네 병원부터 달려갔지만 '여기서 못 고치니까 큰 병원에 가봐라'는 말에 지역거점병원으로 향했고 거기서 조차 진단받지 못하고 서울의 가장 큰 병원을 가서야 병명을 알았다. 뇌종양이었다.


그날로 시작된 민희의 투병 생활은 꽤 길게 이어졌다. 5년 하고도 한참 더 걸렸는데 병원비 때문인지 아니면 아픈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는지 나는 몇 년에 한 번 정도 겨우 병문안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큰 수술이 있을 때는 오히려 집에 있어야 했고, 500km 밖의 언니가 무사히 살아 돌아오게만 해달라고 이름 없는 신에게 비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이고, 네가 민희 동생이가.'


십시일반이 익숙했던 그 시절, 소식은 금세 퍼졌고 동네사람들은 엄마가 없이 크는 나에게 늘 십시일반 애틋한 눈빛과 도움을 주셨다. 할머니의 손에 자라는 것과 별개로 엄마의 빈자리에 대한 동네 어른들의 걱정과, 같은 학교를 다녔기에 선생님들의 부담스러운 염려를 받았기에 나는 상대적으로 더 위축되었다. 가끔 통화로 듣는 엄마의 목소리는 긴 투병 생활에 지쳐있는 고통이 녹아 있었고,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더욱 나는 응석을 부릴 수 없었다.


당시 반에서는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불치병 걸린 민희의 동생'이란 타이틀을 얻어 선생님들의 특별취급(동정)을 받면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조회시간에 계단에서 누군가 떠밀어 넘어져도, 화단에서 발을 걸어 무릎이 갈려도, 체육시간에 모두가 결승선에서 나를 비웃으며 기다리고 있어도 그것은 별것이 아니었다. 언니는 그런 평범한 삶조차 누리지 못한 채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버티고 있었다.


옆 베드가 하나씩 비워지는 모습을 몇 달 동안 반복해서 보며, 일 년이 머다 하고 몸 전체로 번지는 종양들을 긁어내기 위한 큰 수술에 들어가다 보면 당연히 몸뿐 아니라 정신도 망가진다. 어제까지 옆 침상에 누워 병마와 싸우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항암치료에 먹은 것도 없이 토하고 머리가 우수수 빠지고, 약물 부작용으로 몸이 부어 혈관조차 잡히지 않아 발가락 사이에 링거바늘을 꽂으며 화장실조차 혼자 갈 수 없었다. 당연히 말수가 줄어들었고 내일 살아있는 것만이 목적인 지옥을 보냈다는 것을 안다. 그 지옥에서 5년 반 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거동은 여전히 힘들었고, 머리는 여전히 빠진 채였다. 평범한 아이들과 다른 오랜 투병 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언니는 내가 준비한 웰컴 선물을 받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감정이 있으나 표현할 수 없는 언니의 일그러진 듯한 그 표정을 해 당황했다.


자폐 N급. 그렇게 언니의 새로운 병명이었다. 오랫동안 삶과 죽음의 가장 가까운 경계선에 산 사람은 감정이 사라지기도 하는 듯했다. 오늘까지도 언니는 병원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나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가끔 TV나 영화에서 불치병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 말 없이 채널을 돌리지 않고 보기만 할 뿐이다. 무심코 내가 일상관용구처럼 '죽고 싶다'는 말을 내뱉으면 언니는 아무 감정 섞이지 않은 말투로 '죽는 건 로또야'하고 대꾸할 뿐이다. 그건 오랫동안 언니의 말버릇이었는데, 입원해 있던 병원의 담당의사들이 매번 엄마가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묻는 말에 답변했던 말을 베낀 것이라는 것을 엄마의 입을 통해 들었다. 맞는 말이지만 '암에 걸리는 것도 확률이고, 살아남는 것도 확률'이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이야기를 하는 의사를 늘 원망했다. 엄마는 빈말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들어야 상대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 모두 다치고 집으로 돌아온 언니에게는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끝없는 노력이 추가되었다. 남들과 똑같이, 평범해지는 것을 목표하면서 언니는 항암 부작용으로 퉁퉁 부운 손가락으로도 연필을 잡고 밀린 공부를 했다. 그리고 엄마의 비호 아래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하지만 사춘기였던 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축하를 받는 언니가 싫었고, 특히 엄마를 몇 년간이나 독차지하고 서울에서 살았다는 것이 미웠다. 언니가 없는 사이에 나는 매일 잠글 수 없는 문고릴 노려보며 잠들었고 지속적인 인생의 밑바닥으로 뚫고 떨어지으니까. 그리고 예기치 않게 비어 버린 엄마의 자리를 메꾸려 어린 동생을 챙기고, 할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뒷바라지했어야 했으니까. 원치 않게 집에 유일한 엄마의 딸이 되어 할머니의 구박에 집안일과 식모살이 같은 일상을 보냈으니까. 특히 가해자와 한 집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듯 굴면서 속으로는 언제 또 덮쳐질지 모른다는 공포 싸워야 했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아버지와 한 집, 그것도 엄마가 자살시도한 사건현장을 매일 닦으며 거듭 되새김질하며 살아야 했으니까. 나도 보호받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는데, 눈앞에서 가장 보호받고 있는 존재가 나타났으니까.


철없는 마음으로 심지어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상처를 갖고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느니, 차라리 언니처럼 모두에게 보이는 상처를 갖고 동정받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언니가 매일 어떤 전쟁을 치르고 살아 돌아왔는지 모른 채, 그녀가 엄마를 수족처럼 부리고 노예 부리듯 나를 부리는 것을 혐오했다. 완치 판명을 받기까지 내내 나는 언니와 싸웠다. 아주 사소한 것을 핑계 삼아 싸우며 서로 상처 입히고 또 상처 입혔다. 지금에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항상 진일이의 '엄마는 널 버리고 민희랑 사남 이만 데리고 집 나갈 거야'라는 그 속삭임에 세뇌되어 나의 불안과 공포를 언니에게 떠넘기고 싶었던 것 같다. 너무 미웠고 아픈 언니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싫어지고 괴로웠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언니 또한 나를 지독하게 경계했다. 아마 서로 싫어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와 내일이 오지 않을까 봐 두려운 언니.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것을 기도하며 절망하며 살았다. 서로가 가진 것이 부러워 서로를 질투했고 벽을 쌓았다. 다르지 않은 전쟁에서 매일 패배하고 아파하면서도 내 상처가 이렇게 아프다 서로에게, 아니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했다. 나에겐 도저히 그럴 용기가 없었고, 언니는 그러기엔 여전히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다. 그저 살아만 있어 주면 감사한 존재이기 때문에 엄마와 아버지는 언니에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평범한 사람으로만 살 수 있으면 된다는 그 말들이 부러웠다. 때문에 나는 언니가 건강해 지면 건강할 수록 좀 더 지독한 질투를 품고 살아왔다. 스스로의 감정에 파악할수록 조울증과 자기비하가 심해지고 이내 자학으로 빠져 들었다. 언니가 행복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그림자 속에 숨죽이고 사는 내 모습이 추악해 스스로가 질려가면서 점차 자해하는 것으로 번지고 몰래 손목을 긋거나 집 옥상 난간에 서서 오랫동안 아래를 내려다 보는 일을 반복했다.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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