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들통 속의 개구리
그렇게 엄마가 첫 번째 이혼을 했냐고? 아니.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의 결혼 생활을 보고 있자면 계속 개구리와 커다란 들통이 떠오르곤 한다. 좁고 깊은 그 들통 속이 마치 우물 속처럼 느껴 아늑하게 안주하며 헤엄치다 서서히 오르는 온도에 천천히 적응하다 하다 종내엔 펄펄 끓는 고온의 들통 속에서 어떤 소리도 하지 못하고 삶아지고 마는 오래된 '개구리 삶는 법'이라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당신에게 비치곤 했다. 이 이야기의 가장 무서운 점은 개구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들어있는 그 들통이 우물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결코 예상치 못한다는 것이다. 비단 엄마 만이 들통 속의 개구리였던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해당되었다. 아빠가 '별 일 아니다'라고 하면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 이 집안의 특징이었다.
그 들통 같은 집안에서 나와 피를 나눈 이들 모두 엄마의 손목 상처에 대해 침묵했다. 유일한 청개구리인 나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모른 척 엄마의 상처에 대해 물었지만, 되려 많은 방관자들에게 '어린 게 쓸데없는 데 관심 같지 마'라는 회신을 얻고 좌절했다.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모두 잊은 것처럼 굴어 어린 나는 가족들이 역겨웠다. 피해자와 가해자, 쓸데없던 이분법이 정론이었던 어린 시절, 정의로운 세상을 살기 위해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흑백논리를 가진 부루퉁한 나의 눈에는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서 입을 닫고 있는 모두를 가해자라 여기며 속이 곯아갔다.
어째서 다들 엄마의 상처를 몰라줄까, 눈앞에 뻔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도 어째서 입 닫고 있는 거지?
어째서 아버지는 엄마가 과다출혈로 쓰러졌을 때 응급차를 부르지도 않고 안고 병원으로 뛰어가지도 않았지?
어째서 엄마가 잘못한 것처럼 다들 그런 눈으로 엄마를 보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 없었으나 고작 열댓 살의 나의 반항을, 그저 청개구리의 그것에 치부되고 가해자들의 침묵과 눈빛에 묻혀 버렸다. 피해자인 엄마조차 죄지은 사람처럼 굴며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지속했기에 나의 납득은 조금도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해 삶의 굴레를 계속 굴리고 연일 삶이 이어졌다. 그때 내가 엄마 편으로 선 것은,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까지 엄마를 저버리면 정말 떠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공포였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닫은 채 지내며 화목과는 매우 먼, 답이 없는 집안 풍경이 이어졌지나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소시오패스 아버지가 의도한 것처럼 우리는 엄마를 보란 듯이 무시하는 것에 동참하며 제 입에 들어갈 밥과 입을 옷 잘 자리만 중요하게 따졌다.
마치 현대판 노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휴일보다 더 아버지의 음력 생일은 챙겼고 국경일보다 중요시하며 그날이 오면 갈비찜과 잡채, 미역국이 기본이고 케이크와 더불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별 것 아닌 생일을 기념했다. 반면 엄마의 생일은 모두의 축하는커녕 '그런 날이 있었어?' 하는 의문만 갖고 무시하고 지나갔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엄마의 생일을 기념한 것은 단 한 번으로, 없는 용돈을 모아 나와 동생이 엄마의 생일 케이크와 샴페인을 사다 준 단 하루만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챙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아버지가 엄마의 생일을 챙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자식 넷과 남편과 시어머니의 생일까지 모두 챙기고, 심지어 3대 독자라 돌아가신 조상님들 제사상까지 큰며느리로 오롯이 챙기면서 본인 생일은 챙김 받지 못하는 엄마. 늘 그 정도의 취급을 받았기에 아버지에게 다정한 한마디를 받으면 세상을 다 가진 소녀처럼 양쪽 보조개가 패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엄마는 웃음이 아주 많은 사람 었지만 나는 그 모습이 못내 가여워 늘 밥상에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엄마가 진심으로 행복해 보일 때가 있었는데, 바로 일을 하며 다른 사람과 만날 때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맞벌이라는 개념이 지금보다 보편적이지 않았지만 엄마는 막내 동생을 낳고 거의 바로 일을 시작했다. 보통 '우리 엄마는 일해'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엄마의 외모에 속아 '선생님이셔?'라고 했지만, 사실 엄마는 경상도 남자들의 땀내와 시멘트 가루와 거친 톱밥 먼지 속에서 집을 짓고 팔고 하는 일을 중개하셨다. 흔히 '십장이'라고 하는 공사 인부들을 그날그날 건축 현장에 대절하는 일부터 완공 후 집을 시장에 내놓고 매매하는 공인중개사일까지 같이 하셨다. 유치원 때부터 엄마가 건축 현장에 들를 때면 차 안에 남겨지는 역을 내가 맡았다. 한참 악몽에 시달리던 시절이라 엄마와 떨어져 차 안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이 몹시 싫었던 나는 잠시라도 혼자 차 안에 남겨지면 토를 하고 매우 신경질 적인 모습을 보이다 르망 차문을 박차고 집 짓는 현장으로 냅다 달려가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지붕이 채 얹어지기도 전이라 기둥인지 벽인지 모를 벽돌 위에서 길게 한 줄 내려온 납덩이 추가 신기해 이리저리 돌리며 놀고 있으면 토목 하는 아저씨가 뛰어나와 건드리지 말라고 호통을 치며 크게 혼나기도 했다. 그때 톱밥 먼지를 뒤집어쓴 엄마가 나를 찾아내곤 덜 마른 벽 옆은 위험하니까 차 안에 있으라며 화내셨는데 서럽다기보다는 '나에겐 위험한 곳인데 엄마는 어째서 저렇게 뛰어다니면서 괜찮은 걸까'하고 위험한 일을 하는 당신이 원더우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와는 달리 아버지보다 훨씬 무서워 보이는 아저씨들을 말 한마디로 통솔하는 엄마가 멋있게 보였다. 그리고 어째서 아버지에게는 저런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걸까 하는 끝없는 의문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전형적인 9급 공무원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내려온 업무를 하면 쥐꼬리만 한 월급이 통장에 꽂혔고 매일 보는 동료들과 쌓여가는 연차 속에 같은 매일을 쳇바퀴를 돌 듯 끊임없이 돌고 도는 일을 하는 안정적인 삶을 사는 직업이다. 적성에 딱 맞게도 아버지는 좋게 말해 낙천적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게으른 사람이었으며 소시오패스답게 자신보다 대단한 사람에겐 눈치껏 비위를 맞춰주며 쉽게 웃음을 내주고, 자신에게 필요 없는 사람들에겐 얄짤 없었다. 그렇기에 밖에서의 평가는 늘 호탕한 사람, 시원시원한 사람이었으나 어린 내가 주말에 내가 방을 걸레질하고 있어도 결코 TV 보며 누워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이 내 아버지였다. 그는 주말 동안 집에 내내 있는 일이 드물었고 설사 그런 날이 있더라도 넷이나 되는 자식을 데리고 동네 뒷산을 산책을 나가는 일도 없고 바다를 거니는 일도 없었다. 또 자신은 가장이기에 돈만 벌어오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여 집안일을 거드는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다. 당신이 가족을 대하는 방식은 오로지 갑과 을, 그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가족이 먹을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줌을 퇴근길에 사다 주는 일도 없었다. 그렇기에 일찍 당뇨병을 얻어 병들었다. 주변에서 당뇨로 돌아가신 지인의 이야기에 갑자기 정신이 든 아버지는 병원을 다녔고, 인슐린을 맞으면서도 내내 누워있는 것을 계속했다. 그나마 좁은 방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만보기의 걸음을 채웠는데 그 모습 또한 들통 속에서 빠진 개구리가 빙빙 돌며 헤엄치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 집은 걸어서 5분이면 바닷가 해변이 아주 근사했지만 아버지는 차를 타고 지나쳐 갈 뿐 결코 그 해변가를 걷지 않았다.
당뇨를 얻고 나서는 남다르게 더 히스테릭해졌는데, 먹을 수 있는 것이 제한된 이유였으리라. 그동안 마음껏 이것저것 주워 먹던 것을 관두고 도박하며 마시던 술도 끊자 의사가 허락한 몇 가지에 집착하듯 굴었는데 그것은 바로 '땅콩'이었다. 구워도 되지 않고 소금이 뿌려져서도 안되고 오로지 '삶은 땅콩'을 드셔야 한다는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그 특별한 '삶은 땅콩'은 사람들의 기호가 높지 않아 파는 날 또한 손에 꼽았는데, 주말 그것도 토요일에만 구할 수 있었으며 사 오는 것은 꼭 나 또는 엄마에게 시켰다. 다리가 멀쩡한 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당신은 항상 나와 엄마를 시켰으며 바쁜 엄마가 장을 보다 실수로 땅콩을 빼놓고 오기라도 하면 주말 내내 집안은 불지옥 위를 걸어야만 했다.
종일 등을 돌린 채 방 한가운데에서 드러누워 침묵의 시위를 강행하며 말을 거는 모두에게 시퍼런 칼날 같은 힐난을 퍼부었다. 해뜨기 전 집에서 나가 해져서 겨우 들어온 엄마에게 그깟 땅콩이 뭐라고 그렇게 화를 내는 건지,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본인이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당뇨에 땅콩보다 걷기 운동이 더 좋은 것이 아닌가, 갖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전부 내뱉을 순 없었다. 힘없는 나는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삶은 땅콩'을 사러 자청하여 시장으로 달렸다. 그랬기에 나는 최근에 어떤 드라마의 자신의 콩밥의 콩을 딸에게 덜어주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짧은 영상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표상이란 저런 거구나. 그동안의 미미한 의심이 확실으로 돌아오는 입맛이 씁쓸하기만 했다. 늘 엄마는 아버지가 당신을 외형적으로 가장 닮았다고 생각해 나를 제일 아낀다고 말하곤 했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왜냐면 본인의 입으로 들은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저 엄마를 통해 그렇게 세뇌당한 것뿐이다. 한 번은 아버지가 '네 엄마가 알아서 다 주깨는데 (나까지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다'며 자신의 다정치 못한 탓 조차 엄마에게 탓을 넘기는 것을 끝으로 나는 아버지에게 기대를 버리고 그를 믿지 않기로 했다. 그는 사탄에게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으면 대신할 자식을 갖다 받칠 인간이었다. 그리고 또 말하겠지. 이건 사탄 탓이라고.
추측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 그 밤조차 아버지는 엄마 탓을 했다.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는 듯, 늘어난 난닝구와 팬티 차림으로 씩씩 거리면서도 엄마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네 엄마 탓이다'라고 우릴 세뇌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렇게 하고도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엄마가 곁에 있어 세상을 쉽게 살았다. 엄마는 '사랑하니까'라는 말로 '아이들 아빠니까'라는 핑계로 그 모든 것을 용인하고 감내했다. 시어머니와 공무원 아버지, 내조 잘하는 어머니, 공부 잘하는 큰 아들, 예쁜 둘째 딸, 엄마를 돕는 셋째 딸, 귀여운 막내아들. 이렇게 겉으로 봤을 때 흠결이 없는 완벽한 집 안을 유지하며 체면을 차리는 와중에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천천히 곯아 가고 썩어가고 있었다.
그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일인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