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사는 게 맞는 걸까?’ 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그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 모든 방식은 나름 맞는 방식이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나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 내 안에는 이런 필요와 이런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삶을 견디고, 가능한 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넌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너와 다르다고 그들을 시기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된다. 네가 ‘옳은지’를 묻지 말고, 네 영혼과 그 영혼의 필요를 네 몸처럼, 이름처럼, 태어난 집안처럼 받아들이렴. 주어진 것, 피할 수 없는 그것을 긍정하고, 그 편이 되어주어야 해. 온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 헤르만 헤세
→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리에 멍치를 맞은 듯 멍해졌다. 왜 나는 내가 사는 방식의 옳고 그름을 나도 모르게 검열하고 있었을까. 삶에 방식에는 정답이 없고, 답도 없는데. 나는 어딘가 정해진 답이 있고, 그 답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믿고 살았다. 정말로 어리석게도 말이다. 그런 어리석은 나에게 헤세는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나는 나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 내 안에는 이런 필요가 있다. 나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정말로 나는 나다. 나는 다른 누군가와 다르기 때문에 나이고, 나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실현하고 경험하며 창조하기 위해 지구별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내가 옳은지, 상대가 옳은지를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질문이다. 나의 영혼과 상대의 영혼이 지구별에 이런 모양으로 태어난 것은 주어진 것,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그 편이 되어 주어야 한다. 온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대 해도...
이제부터는 나의 필요와 욕망, 나의 영혼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기로 하자. 그것이 어떤 필요와 욕망을 내세우든 그것을 들어주자. 나의 영혼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던, 그것이 어떤 삶을 꿈꾸는지 들어주고, 그 편이 되어주자. 나의 가장 진실하고 든든한 내편은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나의 욕망과 필요, 영혼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귀담아 들어주자.
→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 어떻게? 나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걸을 때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하루 24시간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한 사람이다. 나의 가장 큰 욕망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며 그 곳을 걷고 여행하며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삶을 모험하고 놀이하듯 사는 것이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노예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을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좋아하는 숲을 걷고, 내가 먹을 건강한 채소를 텃밭에서 키워 먹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새소리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고, 촉촉한 이슬을 머금은 맑은 공기가 폐속으로 가득 들어와 아침을 깨우는 곳에 살고 싶다.
아름다운 봄꽃들이 핀 들판을 산책하고,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걷고, 단풍이 아름다운 산을 걷고 싶다. 나는 그냥 자연 안에서 존재하고,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영혼을 타고 났다. 자연 안에서 걸을 떄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운 영혼.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영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고집이 있는 사람은 단 한 가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바로 자신 속의 신비한 힘, 바로 자신을 살게 하고, 성장하도록 하는 그 힘 말이다. 이 힘은 결코 돈 같은 것으로 얻어지거나, 고양되거나, 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돈과 권력은 불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깃든 힘을 불신하는 사람, 그 힘이 부족한 사람은 돈 같은 대체재로 이를 상쇄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 그저 순수하고 자유롭게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살고자 하고, 그런 삶을 펼쳐나가는 것 외에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겐 과대평가되고, 무지막지하게 떠받들어지는 돈과 권력이라는 수단은 부차적인 도구로 전락한다. 돈과 권력을 활용한다면 뭐 유쾌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삶에 결코 결정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어제 이나가키 에미코의 책 <살림지옥 해방일지> 를 읽고 옷 100벌을 버리며 느꼈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깃든 힘을 불신하는 사람, 그 힘이 부족한 사람은 옷(물건, 돈) 같은 대체재로 이를 상쇄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옷으로 나를 감싸고, 나의 힘과 개성을 드러내길 원하여 그 많은 옷들이 필요해진다는 사실을. 그러나 고집이 있는 사람, 자신 속의 신비한 힘, 자신을 살게 하고, 성장하도록 하는 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옷과 물건, 돈이 필요치 않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인정이 중요하지 않기에 그들은 옷과 물건으로 자신의 거짓된 힘을 꾸며내고 연약함을 가릴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그저 순수하고 자유롭게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하고자 하고, 그런 삶을 펼쳐나가는 것 외에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겐 옷과 물건, 돈이 부차적인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이 바라는 삶을 펼쳐나가는데 돈을 활용하긴 하지만 그 돈이 삶의 목적이 되거나 삶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순수하고 자유롭게 나에게 주어진 영혼이 바라는 삶을 살고자 한다. 내 안에 깃든 신비한 힘, 내 영혼이 태고난 모양, 나 자신을 이런 모양으로 살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그 힘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 잠재력을 꽃피우는 삶을 살고 싶다. 옷과 물건, 돈에 의지하지 않고, 그것들로 나의 영혼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기대지 않고 그저 나의 타고난 영혼의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