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데이팸(주)
SCENE SEVEN- 데이팸(주)
11월 말 어느날 아침. 에이린의 작은 카페.
음악
무대 다시 밝아지면 세 명의 배우가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고 손님으로 서너 명이 앉아서 음악을 즐기고 있다. 다렌이 흰색으로 ‘데이팸’ 글자가 찍힌 오렌지색 점퍼와 모자를 쓴 채 카페에 들어온다. 노래 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손님을 맞이하는 에일린.
에일린
안녕하세요. 모두 몇 분이시죠?
다렌
아, 안녕하세요. 전 다렌 이라구 하구요, “행복을 배달하는 일일 가족 서비스 <데이팸>”에서 왔습니다.
에일린
아.. 안녕하세요.
다렌
혹시 에일린 고객님이신가요?
에일린
네. 맞아요. 제가 얼마전에 연락드린 의뢰인 에일린 입니다. …
다렌
아, 네.. 고객님. 처음 뵙겠습니다.
에일린이 다렌을 빈 자리로 안내한다.
에일린
많이 춥죠? 요즘 부쩍 날씨가 차가워 졌어요. 차를 한 잔 드릴까요? ‘우유하고 설탕은’?
다렌
아, 네. 고객님. 안 그래도 따듯한 홍차 생각이 났던 참이에요. 고맙습니다. 설탕은 빼고요.
노래소리 다시 조금씩 커진다. 에일린이 차를 준비해 갖고 나오는 동안 다렌은 장갑을 벗고 자리에 앉으며 카페 인테리어를 쳐다본다.
우유, 찻잔, 티폿, 그리고 비스킷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다시 나타나는 에일린. 노래는 끝이 난다.
감사합니다. 아주 예쁜 곳이군요. 이곳 카페는 혼자 운영하시는 거에요?
에일린
네. 그이가 먼저 떠나고 이것 저것 하다가 이젠 나이가 좀 드니까 힘쓰는 일은 더이상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먼저간 남편 앞으로 남겨진 돈을 좀 보태서 조그맣게 차린거에요.
다렌
아이고, 죄송합니다. 고객님 .. 사별을 하셨군요.
에일린
오래된 일이라 이젠 괜찮아요.
다렌
제 기억엔 한 번도 뵙지 못한 것 같은데 혹시 이번에 연락하신 게.. 저희 회사 서비스는 처음 이세요?
에일린
지나치다 얼마전 광고를 한 번 봤어요. 그래서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연락을 할 지는..저도 몰랐어요. 좀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다렌
아, 네..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고 노트를 꺼내면서 말을 이어간다.
잘 하셨습니다. 고객님, 크리스마스 디너를 신청하신 거죠?
에일린
네, 맞아요.
다렌
아.. 저희 회사 스케줄상 크리스마스 이브엔 고객이 많이 몰리는 시즌이라 상당히 바쁘거든요. 먼저 혹시 일정을 좀 바꾸실 의향은 없으신 건가요?
에일린
정말..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고 싶어요.
사이.
다렌
음…. .. 네 ..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일정을 맞춰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방문을 한 이유는요, 고객님 요구대로 진행을 하려면 먼저 고객님에 대한 사전 정보가 좀 필요해서요. 보통은 이메일이나 메모함으로 남겨 주시는데 고객님께서 타이핑을 좀 어려워 하시는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만나 뵙고 제가 말씀을 들어보려고 직접 찾아온 거에요. 몇가지 물어보면서 답해 주시는 말씀 중 저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여기 노트에 좀 옮겨 적어가도 될까요?
에일린
아.. 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뭘 어떤걸 말씀 드려야 하나요?
다렌
어려운 질문들 아니니까 편하게 대해주시면 됩니다. 먼저 어머님 나이, 가족사, 최근 일어난 일등…등을 저희가 좀 알아야 서비스 당일 더 진짜처럼 상황을 연출해 드릴 수 있거든요.
에일린
아, 네.. 그래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간다. 다렌은 노트를 펼친다.
….그럼 시작할까요?
다렌
네.
에일린
그렇게 까지 보이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제 … 나이는 일흔 하나에요. 헬렌이라는 딸이 하나 있고, 또 윌리엄, 다렌, 크리스라는 아들들도 있어요. .. 다렌만 빼고 모두들 결혼은 했구요.
다렌
아.. 자녀들이 꽤 있으시군요. 하- 제 이름도 다렌인데… 싱글이신 아드님과 이름이 같네요. 긴장하시지 말고 편하게 말씀하시면 제가 필요한 부분만 취합하겠습니다.
에일린
아.. 그래요? 그러고 보니 제 아들 다렌과 나이도 비슷한 또래가 될 것 같군요…
사이.
이건 좀 창피한 얘기지만.. 힘들게 노력해서 돈을 좀 모아 다시 일어서긴 했는데 그 바람에 자식 농사는 영 신경을 쓰지 못했던것 같아요. 전엔 아이들이 가끔이라도 찾아와서 .. 물론 생각해보면 대부분 돈이 필요할 때 였지만, 그래도…적적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내가 허리가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디가 많이 아프거나 문제가 있어서 돌봐 줘야할 정도는 아닌데 이 노인네가 돈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는지 아예 보러 오질 않아서 솔직히 문득 문득 외로움을 좀 느끼는 편이에요.
다렌
아, 네. 요즘 세대가 고객님 세대와는 생각이나 행동이 기대만큼 다르죠.
에일린
우리 나이쯤 되면 영국 사회가 준 숙제를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어디서든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린 매번 속옷을 캘빈 클라인이 아니라 막스 앤 스펜서에서만 사 입죠. 당신은 거기서 사 입지 않잖아요?
다렌
네? 무슨 뜻이죠?
에일린
생각이나 행동이 다를 수 있는 건 소비하는 곳들도 다르다는 거에요. ,,, 나이든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아이를 낳고 키워놓으면… 저도 그랬듯이 그 새로운 세대는 나이든 세대가 즐겨 가는 곳을 애써 피하려고 노력하죠. 섞이지 않으려고 말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확 지나가버려서 노인이 되어 사회적 역할이 다 끝나 있음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다렌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고객님 여전히 건강하시고 또..
에일린
고마워요. 당신은 자리에 앉을 때나 일어날 때 소리내지 않죠? (웃음) 전 이젠 더 이상 아니에요, 젊음과 나이듦은 자연의 눈으로 보면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만약 지금 코로나와 유사한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어서 갖난 아이가 죽어버리는 병이 있다면.. 그 병은 어차피 모든 아이를 죽이기 때문에 다음 세대로 넘어가 전파 될 수 가 없어요. 한 순간에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노화된 상태에서만 발생하는 병.. 예를 들어 치매 같은 병은 다음 세대로 계속 넘어갈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다음 세대를 책임질 아이를 출산한 후에 나타나는 병이라서 그렇죠. 그래서 어린 세대들은 자연이 보호를 해 주는 것이고 그랬던 똑같은 자연이 나이든 세대에는 결과적으로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저 같은 노인들의 삶의 종착지는 거의 다 온거나 마찬가지지 않을까요?
다렌
고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것이 인간의 삶 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슬프기도 하지만요.
에일린
사실 전 아이들이 어릴 땐 꽤 행복했고 지금보다 훨씬 잘살았어요. 결혼은 좀 늦게 한 편이었는데 워낙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보니 주눅이 많이 들어 성격이 자신감 없고 소심했죠. 그래도 젊었을 땐 대학에서 생물학 강사를 하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렸했던거 같아요. 남편이 일반 회사원이었는데 아이를 낳을 무렵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 하면서 뭐 그렇게 부자는 아니더라도 아이들 사립학교 보내고,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걸 다 시켜주며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았어요. …아이들은 제가 들어갈 틈도 없을 정도로 유대감이 정말 끈끈했어요. 가끔은 소외감이 들긴 했는데 아이들끼리 사이가 나쁜것 보단 좋은 게 낫다 싶었죠. 남들이 봤을 때도 저희 가족은 참 화목한 가족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두-둥
과거의 회상 장면으로 이어진다. 순간, 젊은 에일린과 어린 학생인 윌리엄, 헬렌이 현실과 중첩되어 나타난다.
다렌
어? 이게 뭐죠?
순간, 젊은 에일린과 어린 학생인 윌리엄, 헬렌이 현실과 중첩되어 나타난다. 갑자기 검은 선글라스를 쓴 은행 직원과 법원에서 함께 나온 직원(bailiff)이 집으로 들이닥치면서 여기저기 붉은색 압류 스티커를 마구 붙인다. 엄마 에일린은 포기한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다렌은 좀 놀란 듯 쳐다본다.
어린 헬렌
엄마 이 사람들 뭐야? 이 사람들 왜 우리 집에 맘대로 들어오는데? 뭐라도 좀 해봐. 말려야 하는거 아냐?
어린 헬렌은 이들은 막으려 한다.
아저씨들 뭔데 우리 집에 와서 이런거 막 붙이는 거에요? 도대체 뭘 붙이는 거에요? 윌리엄 오빠, 오빠 여기 와서 좀 같이 말려줘.
어린 윌리엄, 에일린은 체념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뭐하는거야? 엄마, 도대체 뭔데? 아빠는 어디간거야? 뭐야, 왜 아무도 말리지 않는 거야? 아저씨, 아저씨들 그만 하세요.
은행 직원이 어린 헬렌을 뒤로 밀어내고 헬렌은 소리를 지르고 넘어진다. 윌리엄은 장면을 지켜보다가 주먹을 쥔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다시 현실
에일린
내년이면 대학에 들어가는 해 였는데 온통 집안이 빨간 딱지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거죠. 당연히 윌리엄하고 헬렌은 학비를 못내서 사립 학교에서도 나오게 되고 다음해 대학 시험을 망쳐버렸어요. 아이들 원망을 많이 샀죠. 이후엔 인생마저 망친 것처럼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이런 시기가 좀 오래 지속되면서 아이들 모두 힘든 사춘기를 보내야했어요. 가족들 모두 말 수도 점점 없어지고..
다렌
마음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두-둥
회상
2배속 움직임- 무대 한 켠에 젊은 남자가 잡센터 플러스(직업 소개소)에서 나와 홈베이스(창고형 DIY 매장) 앞에서 일용직을 구하기 위해 서성인다. 젊은 에일린이 등장해 새벽엔 농수산물 시장에서 과일을 나르고, 점심부터 저녁까지는 카페에서 주방 일을 하고 새벽에 집을 돌아온다. 벽엔 새벽 2시를 가리키는 시계가 붙어있다.
에일린이 집으로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주저 앉는다.
어린 헬렌이 교복을 입고 피아노를 치고 있다. 무겁고 우울한 음악소리 들린다.
검은 정장을 입고 어린 다렌, 크리스 함께 나란히 서서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를 목격한다. 윌리엄 슬픈 바이얼린 곡을 연주하며 천천히 걸어나와 합류한다.
잠시 후, 나란히 서 연주하던 윌리엄이 악기를 놓고 먼저 도망가듯 밖으로 나가고, 피아노를 치던 헬렌이 연주를 중단하고 오빠를 따라 나간다.
다시 현실
에일린
그렇게 일용직을 떠돌던 남편은 과로로 쓰러져 먼저 세상을 먼저 떠났고 그동안 일반 학교로 전학가 잘 다니는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은 밖으로 나돈것 같아요. 내 삶이 막다른 골목으로 향해 가는것 같더라구요. 강의 자리도 잃고,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몰랐죠.
다렌
대체로 저희 고객분들은 사연이 참 많은 편인데 고객님도 어려운 삶의 과정을 지나왔군요.
두-둥
회상
에일린 다시 식재료 상자를 운반한다. 상자를 펼쳐 재료들을 여기저기 나누어 담고 안으로 들어간다. 교복 차림의 윌리엄이 나타나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는 그냥 말없이 나간다. 뒤이어 어린 헬렌이 나타나 역시 그냥 가려 하다가 다시 나오는 에일린과 마주친다.
에일린
어.. 학교에 있어 할 니가 이 시간에 여긴 왜 찾아온거야?
어린 헬렌
엄마, 오빠하고 내가 학교에서 뭐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이나 있는 거야? 그깟 과일 쥬스 몇 잔 팔아 푼돈 벌어서 나 피아노 레슨 비용도 못해주면서 도대체 뭐야 이게? 그것도 우리 학교 앞에서 친구들 보는데 창피하게. 이렇게 놀림 받고 사는거 이제 지긋 지긋해. 우리 핑계대고 친구들 엄마 앞에서 굽신거리면서 서비스 하지말고 제발 다른 곳으로 좀 가. 안그러면 오빠랑 나 … 이제부터 찾지마! 그냥 나가 버릴테니까.
어린 헬렌 학교 가방을 에일린에게 던져 버리고 도망치듯 나가버린다.
두-둥
세월이 흘러, 에일린 과일 가게 점원에서 작은 카페 주인이 되어있다. 카페에서 마지막 손님을 끝으로 문을 닫으려 하는 에일린. 남 여 손님이 들어오려 한다. 문을 닫았다는 사인을 입구에 걸어두려는데 눈이 마주치자 늦었으니 내일 오라고 사인을 주고 가려다 다시 돌아선다. 순간 성인이 된 큰 아들 윌리엄과 헬렌임을 알아차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서로를 껴안는다. 서로 눈물을 흘린다.
다시 현실
에일린
성인이 다 되어서야 각자 알아서 결혼도 하고 손주도 낳고….. 그렇게 살다 보니 내가 생각 났었는지 갑자기 잘못했다면서 하나씩 다시 집으로 찾아와 연락이 되었어요.
다렌
아.. 다행이네요
에일린
고마운 일이죠. 그래도 엄마라도 다시 이렇게 일어나니 가끔 찾아오게 된 거 같아요.
두-둥
윌리엄이 에일린의 카페로 찾아온다. 에일린은 준비했던 돈 봉투를 전해주면서 윌리엄을 안아준다. 그리고 윌리엄이 떠나자 헬렌이 선물을 들고 찾아와 역시 돈을 받아 고맙다며 인사하고 떠난다. 이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또 한 명의 남자가 있다. 막내 아들 크리스다.
다시 현실.
에일린
미안함에 도와준 거에요. 뭐 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비록 돈 때문이었지만 불순한 목적이 보이는 효심이라도 받았을 때가 그렇게 찾아와주니 행복 했었던것 같아요. 외롭지도 않았구요.
다렌
고객님에게 연락이 없었던 동안에 형제들은 서로 연락을 하면서 지냈던 모양이군요. 아니면 고객님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에일린
자기들은 부모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땐 제가 엄마로서 의지가 못되었으니 자신들끼리 의지한거겠죠.
실소를 짓는다.
그런데… 최근 몇 년은 제가 먼저 연락을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잘 찾아오지 않네요.
무대 한 쪽에서 조명이 비치면 크리스가 전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크리스
엄마.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어? 연락 못해서 미안해.
에일린 쳐다보며 안타깝게 고개만 끄덕인다.
엄마. 건강은 어때? 형하고 누난 잘 있어? 한 번 찾아 뵙고 싶은데 일 때문인지 생각대로 되지 않네. 아니, 가깝지 않아. 엄마 오기 쉽지 않은 곳이야. 아니, 그런데가 있어. 조금만 더 있으면 편하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네. 네. 그럼요. 만나는 사람? … 있어. 엄마… 나 ..여기 중국이야. 여기서 만났어. 사실… 결혼도... 네, 아들. 다음에 가면 꼭 한 번 데리고 갈께. 아니, 아직. …그래서 그런지 매번 찾아가기 쉽지 않더라요. 워낙 경비도 많이 들고… 아.. 엄마가 그렇게 해주면 … 고맙지. 그럼 더 자주 찾아 뵐 수 있어서 좋겠네. 엄마 꼭 모시고 올께.. 고생 그만 하고 곧 우리랑 같이 살아요. 네. 걱정 마세요. 엄마… 그럼 또 전화 할께. 사랑해.
에일린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크리스를 쳐다본다. 크리스 전화를 끊고 사라진다. .. 크리스 전화가 끊어지자 윌리엄 들어온다.
윌리엄
엄마. 이번에 엄마 손주 결혼 하잖아. 집을 하나 장만해 주고 싶은데 돈이 좀 모자라서. 그래서 말인데, 엄마가 좀 해줄 수 있을까?
에일린
…안 그래도 혼자선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좀 보태라고 모아둔 게 있어. 이제 늙은 엄마가 돈이 뭐가 필요하겠니? 은행 주택 융자를 조금이라도 적게 하고 보증금에 이걸 써.
엄마가 현금 봉투를 꺼낸다.
에일린
이거 아빠 통장에 있던 돈인데 우리 손주 집 사는데 보탠다고 하면 돌아가신 아빠도 좋아하실꺼다.
윌리엄
얼마 정도 되는데?
에일린
£50K 정도 될꺼야.
윌리엄
그 정도는 많이 모자랄 텐데. 엄마 더 없어? 조금만 더 보태줘요. 하나밖에 없는 장손인데.
에일린
지금 이 돈으로 먼저 구해보고 더 어려우면 찾아와. 그때 더 해줄께.
윌리엄 기분이 확 좋아진 모습이다.
윌리엄
알았어요. 아, 엄마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엔 결혼 준비가 많이 밀려서 못 갈 수 도 있어. 제가 미리 연락 드릴께요. 엄마. 그럼. 전화할께요.
윌리엄 나간다.
사이.
에일린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 있어요. 크리스 친구가 어느날 전화를 해서 베트남에 워킹 홀리데이..인가 뭔가를 제안했대요. 그래서 준비해서 떠났는데 거기 도착해보니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이 많았나 봐요. 첫 날 웰컴 파티에서 술을 좀 마셨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중국이더래요.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도 없이 구금되어 강제로 보이스피싱을 배웠다고 하더라구요. 감시하는 사람 없이 외출도 안되고.. 거기서 여자를 만나서 결혼까지 한 듯해요. 한 번은 비행기표를 보내줬는데도 범죄혐의로 나올 수 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젠 다 해결되어 왕래가 가능합니다.
다렌
세상에! 드라마 같은 삶이군요. 어려운 이야기들을 ..
에일린
마지막으로 딸은 가정사가 생각보다 많이 복잡해요. 자세히 설명 드리긴 좀 힘들지만요. 다렌은 형 때문에 사연이 많은 아이인데, 얼마전 회사를 그만두고 결혼도 미루고 진짜 하고 싶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휴일엔 거리에서 알바를 한다고 하더라구요. 둘 다 마음이 아픈 아이들 입니다.
다렌
네.. 이 정도라면 고객님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것 같군요. 그래서… 다른 자녀들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찾아오지 못한다고 이해하면 되는거죠?
에일린 말이 없다.
다렌
그렇군요. 저희가 이번 크리스마스 디너엔 고객님 기분 전환을 꼭 시켜드리겠습니다.
에일린
고맙습니다.
다렌
더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서면으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당일 제일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에일린 얼굴이 좀 밝아지는 듯 하다.
잘 모르겠어요. 사실 가족이나 친척과 말을 해 본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엄마처럼 화도 내고, 큰소리도 좀 내보고 싶구요, 다른 집안처럼 티격태격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렌
하긴 아무리 행복한 집안이라도 가끔 말다툼 같은 것도 있고, 그러면서 또 가족애가 쌓이는 것 같아요.저희 집도 그런면에서 예외는 아니구요.
에일린의 표정이 더욱 밝아지면서
에일린
그렇죠?
사이.
다렌
음.. 고객님 이번 크리스마스 디너는 좀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해보는게 어때요?
에일린
즉흥적으로요?
다렌
상황이 좀 자연스러우려면 우리 용역 직원들에겐 최소한의 정보만 주고 진짜 자신들의 가족인 듯 편안하게 해보라고 상황에 맞겨 보는거에요.
에일린
그렇게도 가능한가요?
다렌
물론이죠. 가능하긴 한데요, 늘 따듯하고 행복한 분위기를 약속하지는 못하죠. 가족 정보만 주고 나머진 모두 즉흥적이다보니 가끔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전개 되기도 하거든요. 고객님 입장에서는 돈을 지불하고 가족 대행서비스를 받으시는데 만의 하나 기분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는게 좀 불편하실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정말 자연스러운 것을 요구하는 고객분들은 이 선택을 하시기도 합니다. 가식이 아니라 진짜 가족같은 느낌이 나올 수 있거든요. 우리 직원들도 모두 고객님같은 부모님이 있는 나이니까요.
에일린 생각을 잠시 하다가…
에일린
한 번 해봐요. 좋을듯 해요. 저도 너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 디너 자리는 아닌 듯 합니다.
다렌
좋습니다. 저희 <데이팸> 가족사랑 체험 상품이 이렇게 최소한의 설정을 만들어서 최대한 상황이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다렌이 계약서 양식을 꺼낸다.
그럼 여기에 모두 동의하신다고 체크만 해주시고 아래에 사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가능하면 일정 확인해 보구요, 저희측에서 아드님 역할 하나는 추가 비용없이 보너스로 넣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에일린
아..네. 감사합니다. 그럼 모두 몇 명이 참석하는 건가요?
다렌
그건 고객님께서 최대한 크리스마스 디너를 즐길 수 있도록 저희측에서 인원을 조정해서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든든하실 꺼에요. 당일 저녁 식사에 드실 음식은 고객님이 준비해 주시면 되구요. 저도 당일 참석하겠습니다. 나머진 직원들이 도움을 드릴테니 너무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다렌이 패드를 이용해 일정을 체크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수당까지 더해져서 서비스 비용이 좀 높아지긴 하는데요, 일단 고객님 말씀대로… 네, 원하시는 일정으로 저희가 배치 하겠습니다. 오늘 진행을 확정하시면 다음 서비스엔 30% 할인 쿠폰이 발행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일린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해주세요.
에일린의 표정이 밝아진다.
이 늙은이를 신경써줘서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집안이 시끌벅적 하겠어요.
다렌
그럼요. 분명 만족하실꺼에요.
계약서를 들고 약관을 설명한다.
어떻게 진행이 되더라도 불만을 제기하거나 환불을 요구하는 것은 없으니 이 조항 잘 읽고 여기 이 부분에 서명을 해 주시구요, 저희 데이팸 서비스 비용에 추가되는 내역들도 잘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지금 계약금으로 30%를 먼저 주시고 당일 저녁 디너가 모두 종료되면 나머지를 지불해 주시면 됩니다.
에일린
아.. 생각보단 비용이 좀 되는군요.
다렌
대본 없이 즉흥으로 가는거라 조금 더 가격이 나갑니다만 분명히 만족 하실겁니다. 고객님 갖고 계신 가장 높은음으로 큰소리 떵떵 치게 해 드릴께요. 아, 그리고 다음부터는 연휴가 시작되기 한 참 전에 미리 하시면 VIP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해 드릴 수 있어요. 고객님.
에일린
.. 고맙군요.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렌
네. 고객님. 그럼 저희 데이팸 직원들이 하는 모든 대화는 정말 진짜처럼 진행될 꺼에요. 가상이 아닌 상황에 빠져서 하는겁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고객님도 진짜 자식들 대하듯이 해 주셔야 나중에 만족도가 높습니다.
에일린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다렌 떠나려 하다가 잠시..
다렌
그리고 고객님. 아이들에게 힘들게 모은 재산을 막 퍼주는 것 보다 요즘은 부모 대접 받으려면 돈을 꼭 쥐고 있어야 해요. 돈이.. 있으면 아이들이 꼼짝을 못하거든요.
에일린 미소로 답한다.
그럼 고객님. 곧 연락 드리고 예약된 날짜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렌 떠난다.
음악 소리.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라이브 노래 소리. (https://youtu.be/4oeAn8Q4U8I 풍의 연주와 노래)
노래가 끝나면 무대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