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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건 Feb 01. 2021

음악의 은밀한 폭력들

끊임없이 민감해지기

수많은 신조어가 쏟아진다. 우리는 가끔 생각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환란의 시대이자 우리는 환란의 세대*다. 그러나 이것이 언어의 폭력에 무감해져도 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오히려 더 민감해져야 한다. 최대한 무해하게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대중음악의 성실한 청자로서, 곡을 들으며 발견한/경험한 은밀한 폭력들을 아카이브하기로 한다. 유해한 표현은 자유가 포용해야 할 범주가 아니다.



Wanna stay forever dumb

(...)

이렇게 행복하기만 하면 / 난 대박 좋을 텐데

웃고 넘어가고 또 난 웃고 인정하고


- So!YoON! <FOREVER dumb (feat. SAM KIM)> 부분



"dumb"은 "바보 같이" 혹은 "벙어리의" 로 번역되는 단어다. 레드벨벳의 <Dumb Dumb>이라는 곡도 있으니 가볍게 쓰이는 단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같은 표현이 맥락에 따라 혐오적, 폭력적 표현으로 변한다면 그것은 소수자가 처한 불평등의 맥락에서 기인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인도에서 여행 온 친구가 쌀밥이 맛없다며 투덜거릴 때 "너네 나라로 가"라고 말하는 것과, 인도에서 이민 온 노동자에게 "너네 나라로 가"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가 농담으로 수용될 수 있다면 후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민 노동자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수자란 사회의 표준 모델을 벗어나는 집단으로 질 들뢰즈의 정의를 따른다. 그러므로 어떤 표현이 특정 소수자 집단에서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중요한 문제다. 차별과 불평등을, 무엇보다 표현을 접한 당사자들의 고통을 야기할 것이므로.


그렇다면 곡의 맥락은 어떠한가. 샘 킴과 황소윤은 '영원히 바보로 남고 싶다'는 가사를 부른다. 사회적 강요로부터의 탈피다. 앨범 코멘터리를 참고하면 "샘 킴은 항상 어때야 해" 식의 시선에 그가 어려움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바보 같음'은 "행복", "대박 좋"은 것으로 치환된다. 그것은 "너는 웃고 있어야 해"라고 요구하는 시선 앞에서 항상 "웃고 넘어가"거나 "웃고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샘 킴을 향한 사회적 시선도 폭력적이지만, 하필이면 "바보"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풀었다는 점도 폭력적이다. 그 까닭은 사회적 맥락에 있다. 장애인이 다수자인 비장애인에 비해 철저히 소수자 집단으로 소외되고 있는 점, 그리고 그들의 "웃는 얼굴"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로 소비되는 점. 이러한 맥락에서 "영원히 바보로 남고 싶어" 라는 가사는 역설의 문법을 취했음에도, 오히려 역설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폭력이 된다. 그들은 실제로 무지하지 않고 그들의 웃음이 행복을 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비는 특히 그들의 보호자, 그러니까 돌봄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한다. 김연수의 소설이 좋을 듯하다.



"좋은 생각. 그냥 그렇게, 태호와 둘이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 태호가 없다면 내겐 1초도 영원이나 마찬가지야. 아빠는 태호보다 하루를 사는게 소원이라던데, 1초도 살고 싶지 않아."


그러다가 문득 엄마는 차 안이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뒤쪽을 보려고 룸미러를 들여다보다가 엄마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거기 거울 안에서 태호가 엄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나 멀쩡한 눈빛으로,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을 다 듣고 있었다는 듯이. 저도 죽는 줄 알고 깜작 놀라서 저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엄마는 그 착하고 예쁜 눈망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중얼거렸다. 말들이 넘치면 그 말들은 언젠가 깊은 우물 속의 어둠에도 이를 테니까.


- 김연수, <깊은 밤, 기린의 말>, 「사월의 미, 칠월의 솔」46-47p


태호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다. 태호에게 '말'이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을 알면서도 '엄마'는 태호 앞에서 끊임없이 말을 뱉고, 그 중 하나라도 태호에게 가닿기를 바라면서, 다시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엄마'는 태호가 영원히 바보이지 않은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인용한 단락은 그 중 하나다. 태호가 말을 이해한 것 아닐까, 순간 놀라고 다시 중얼거리는 장면. 그러므로 '엄마'에게 "영원히 바보로 남고 싶어" 라는 가사가 어떤 파동을 일으킬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바보로 남'으면 "행복"할 것 같고 "대박 좋"겠다니. '엄마'에게 이 가사는 그녀가 간절히 염원하는 '상태'를 (이미, 선천적으로) 가진 이들이 '태호'와 같은 상태를 낙관하다가도 실은 역설이라고, 자신들의 고통을 이렇게라도 피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진짜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 항상 웃고만 있을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러면 좋겠지만 사실은 그러고 싶진 않다'. 그래서 이 가사는 잔인하다. 샘 킴과 황소윤의 아이디어는 충분히 전해지지만 단어 선택이 옳지 못했다. 'Dumb'이라는 단어의 '말을 못 한다'는 의미보다 '바보 같'아서 '행복해보이는'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 문제다. 샘 킴은 앨범 코멘터리에서 "재밌고 가볍게" 들어주기를 부탁했지만 그럴 수 없다. 폭력적 표현의 고착화와 대중화는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오랜만에 난 내 친구들과 뚜벅 뚜벅

보도블럭을 넘으며

여자들 몸을 눈으로 더듬어


- PEEJAY <I Get Lifted X Beenzino> 부분


이번에는 빈지노의 가사다. 이 곡이 속한 앨범 <WALKIN' Vol.1>은 2015년도에 나왔다. 강남역에서 '여성'이라는 근거로 사람이 살해된 것은 2016년 5월이다. "여자들 몸을 눈으로 더듬어"라는 가사가 혐오 범죄를 야기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를 지적한다면 빈지노의 '비공식 변론인'들은 '여자들의 몸을 눈으로 더듬'는 이유는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혐오'해서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혐오 발언'을 변명할 때 번번이 등장하는 논리다. "여성을 좋아하는데 왜 여성혐오죠?"** 그러나 이 가사는, 분명히, 여성 혐오표현이다. 작사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어째서인가. 언어적 폭력이 '폭력'이라는 점에서, 표현이 발화된 순간 그것은 그것이 수용되는 '지금-여기'의 사회적 맥락에 의해 해석되며 해당 사회적 맥락에 그 표현이 어떠한 파장을 일으키느냐에 따라 이해되기(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맥락은 어떠한가. 2016년으로부터 5년이 지났으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대규모 성범죄가 (이제서야) 드러났으며 '몰카'의 피해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지금-여기'를 살아가고(살아내고) 있다. 이른바 '시선 강간'이 명확한 성희롱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여자들 몸을 눈으로 더듬"는다는 표현은 성범죄를 혹은 성범죄를 당한 경험을 연상시킬 여지가 다분하다. 그뿐일까? 이미 '시선'은 누군가에게 위협과 같다. 이미상 소설 <여자가 지하철 할 때>를 일부 옮긴다.



수진이 왼쪽으로 눈만 살짝 돌리는데 남자가 수진을 보고 있다. 몸을 앞으로 길게 빼고 물끄러미 수진을 보고 있다. 수진은 이럴 때마다 궁금해진다. 정말 발목이 따이면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추울까? 터진 발목으로 피가 다 빠져나가 몸에 피가 한 방울도 안 남은 것처럼 이렇게 온몸이 추울까? 머리만 미친 듯이 뜨겁고, 서서히 다시 피가 오르더니 순식간에 솟구친다.

 남자가 나를 보고 있다.

 남자가 나를 보고 있어.

 수진이 뛰려는 순간,

 "정신 차려."

 얼굴 I이 말한다.

 "지금 가면 죽어."


얼굴 I이 남자1을 본다. 이제 그는 대놓고 수진을 보고 있다. 고개 숙인 남자에서 고개 돌린 남자로 전화한 것이다. (cf. 고개 각도에 따른 위험도: 고개 약간 숙임 위험 10점. 고개 돌림 위험 7점. 고개 많이 숙임 위험 6점.)


"그래도 안 내리고 계속 있어주니 얼마나 고맙니." 얼굴 I이 공중 키스를 날린다.

위험도 0.5점에 빛나는 뜨개질 여자는 미끼 여자다. 미끼 여자는 남자가 칼을 빼 들면 가장 먼저 찔리고 산을 뿌리면 가장 먼저 탄다. 뜨개질 여자가 내리면 수진이 미끼 여자다. 사람들이 시간을 벌려고 내던진 살코기.


- 이미상 <여자가 지하철 할 때>, 「소설 보다 겨울」, 14, 21, 41p


수진은 지하철을 탔다. 평일 오후 지하철은 한산하다.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만 타고 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수진을 본다. 남자는 어떠한 위협도 하지 않고 수진을 바라봤을 뿐인데, 수진은 "발목이 따이"는 상상을 하고 남자가 "칼을 빼"드는 상상을 한다. 수진의 망상이 심각한 게 아니다. 수진이 사는 "지금-여기"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남에서 살해되는'**** 사회이자 '몰래카메라가 상업적으로 공유되는' 사회다. 그러므로 다시, 망상인가?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자들 몸을 눈으로 더듬어"라는 가사가 끊임없이 소비되고 따라 불린다면 '여성은 눈으로 더듬어도 되는 (혹은 더듬어야 하는) 존재'라는 이미지와 관념이 사회 전반에 은밀하게 고착화되는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짙다. 성범죄의 밑거름이자 사회적 공포의 밑바탕이 된다.


음악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사가 있기 때문이다. 악기의 연주란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음악가는 가사가 '지금-여기'의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세밀하게 탐구하고 검토해야 한다. 유해한 예술은 그것을 대중에게 발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회적 혹은 도덕적 이득이 그것의 해로움보다 월등히 클 때에만, 간신히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퍼니 게임>에서 끈질기게 그린 가학이나 데이빗 핀처 감독이 <파이트 클럽>에서 조명하는 두 남자의 주먹다짐처럼. 만약 이러한 '음악의 은밀한 폭력'에 대한 지적에 창작자들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답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예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아티스트'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가수'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이 시대 예술가들이 지녀야 할 책무는 어떤 말을 '하지 않음'을 '하는' 것이리라.


-


*이랑 <환란의 세대> 제목에서 차용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21p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46-47p 참조

****여성혐오 범죄라고 명명하는 것에는 아직 미해결된 논점이 많지만 적어도 분명히 가해자가 "여성 중 아무"를 범죄 대상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홍성수 교수의 말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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