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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생각 Nov 21. 2022

서로 발 씻겨주는 결혼식

영국 결혼식 탐방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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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꼭 껴안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고향은 코로나 이후 기약 없이 멀어져만 갔고, 영영 못 돌아갈 수도 있을 거란 공포감에 이르렀다.

아직 얼굴도 못 본 조카는 어느새 세 살이 되었고, 아버지는 여든을 바라보고 계셨다.

부모가 된 친구들끼리 서로 아기를 봐주며 노는 사진을 보내오면 힘을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립감을 키웠다.

린다를 껴안은 순간 이 모든 서러움이 수면 위로 용솟음친 게 아닐까 짐작해볼 뿐이다.


우리를 숙소로 안내하겠다는 린다를 따라 헛간을 나섰다.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베일리가 아직 어리니까 너네는 여기 독채에서 지내는 게 좋을 거 같아."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로 코티지 문을 열며 린다가 말했다.

코티지 안으로 들어서자 아주 오래된 과거로 순간이동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후각이었다.

퀴퀴하다고 하기엔 싫지 않은 냄새, 시간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내는 옛것의 냄새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여기 1810년도에 지어졌데."

조용한 '우와'를 남발하던 내게 린다가 말했다.

벽에서 두껍게 튀어나온 벽난로가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졌고,

구릿빛 액자에 담긴 유화 몇 점과 베이지색 꽃무늬 커튼이 벽을 장식했다.

바닥에 놓인 연두색 벨벳 쇼파와 앤틱 서랍장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빈티지풍의 홍대 까페나 이태원 골동품 가게와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둘 다 오래된 것들이 공간을 장식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자는 실제로 사람이 살던 가정집이고, 후자는 전자를 본떠 재현한 공간이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박물관에서 볼 법한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이상하게 아늑하고 포근했다.


너무나 과분한 대접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방 한 칸 내줘도 고마울 판에 집 한 채를 통으로 내주다니...

린다 역시 막 돌을 지낸 딸이 있어 이제 7개월 된 베일리가 밤에 얼마나 울어재낄지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

베일리 달래는 스트레스만 해도 충분하니 남 신경 쓰지 마라고 독채를 내어준 린다의 사려깊음에 무한한 감사함이 일었다.

오른쪽이 우리가 묵었던 코티지


"일단 오늘은 밤에 세족식만 있고, 내일은 아침에 등산, 점심 먹고 본채 앞에서 결혼식, 그리고 저녁에 헛간에서 피로연 하고 케일리 추는 게 공식일정이긴 한데, 그냥 너네 편한 대로 하면 돼."

문 밖을 나서며 린다가 말했다.

세족식? 등산?

결혼식에서 접하기 힘든 단어들이 잇달아 등장하여 살짝 당황스러웠으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아쉽게도 우린 그날 저녁 세족식에 가보지 못했다.

새로운 잠자리가 낯설어서인지 이앓이를 해서인지 베일리가 밤새 울어대서 잠깐이라도 나가보려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쉬운 마음에 커튼을 눈곱만큼 젖히고 창밖을 내다봤다.

김이 서려 희뿌연 불빛밖에 안 보였지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로 알 수 있었다.

멀리서라도 함께하고파 핸드폰을 꺼내 'feetwashing(세족식)'을 구글링해보니,

신랑신부가 서로 발을 씻겨주며 늘 겸허함을 잃지 않겠노라는 약속을 하는 기독교적 예식이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문득 임신한 아내에게 발마사지를 해주던 나날이 떠올랐다.

팅팅 부은 다리를 주물러주며 나름 오붓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던 시간들.

출산 후엔 베일리를 재우기 무섭게 곯아떨어지기 바빠 마사지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 정성스레 서로 발을 씻겨주는 저들처럼, 나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겸허한 자세로 아내를..."에까지 생각이 이른 찰나,

"불 들어오니까 커튼 쳐!"라는 매서운 꾸짖음에 겸허한 자세를 취하기로 했던 마음은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

오른쪽 코티지 창문으로 세족식을 내다봄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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