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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생각 Sep 26. 2024

그대는 쉴 줄 아십니까?

사바스와 호캉스

금요일 퇴근 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내게 주어진 약 48시간의 자유.

하지만 주말 동안 진정한 휴식을 취했다고 느낀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회사용 효율만능주의를 그대로 일상에 적용하면 주말은 그저 또 다른 투두리스트가 되어버릴 뿐이다.

그래서인지 일요일 저녁이 되면 뭘 많이 한 것 같기는 한데 몸은 지쳐있다.

쉼에 실패했다는 얘기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현명했다.

그들은 애당초 우리가 “쉬어라” 한다고 쉴 수 있는 종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전력질주 모드에서 갑자기 힘을 빼고 걷기명상을 하라고 하면 그게 될까?

의지만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사바스(Sabbath)’로 칭하는 휴식의 날(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을 정석대로 보내려면 엄격한 메뉴얼을 따라야 한다.


사바스날의 금지행위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모든 상업적 활동(돈과 관련된 모든 행위)

전자기기 사용(핸드폰, 컴퓨터, TV 등)

요리 및 제빵

운전 및 장거리 보행(반경 1km로 제한)

글쓰기 및 그림 그리기

만들기 및 고치는 활동(가구 수리 및 조립 등)

바느질, 뜨개질 및 공예 활동

쇼핑

온수 목욕(냉수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가능) 및 제모


이걸 정석대로 따른다면, 계좌이체도 안 되고(금지사항 #1), 넷플릭스는 당연히 못 보고(금지사항 #2), 라면도 못 끓이고(금지사항 #3), 산책도 못 가고(금지사항 #4), 일기도 못 쓰고(금지사항 #5), 못도 못 박고(금지사항 #6), 팬티도 못 꿰매고(금지사항 #7),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못 하고(금지사항 #1, #2, #4, #8), 면도도 못 한다(금지사항 #9).

즉 생존과 직결된 건 금요일 저녁까지 다 처리해놓아야 하고, 토요일은 정말 발가락도 까닥하지 말고 그냥 숨만 쉬라는 얘기이다.


물론 몇 천 년 전 이야기이고, 현대사회의 유대교인들은 제아무리 정통파라 해도 이 모든 규율을 다 지키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또 모르는 게 지금도 미국 브루클린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가면, 사바스날에 개인이 엘리베이터 작동을 안 해도 되게끔(금지행위 #2)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서는 건물이 있다고 한다.)


쉬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질 것 같지만, 그럼에도 사바스가 신자들에게 이 정도로 빡센 루틴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만큼 쉬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일상의 전력질주에 쉼표를 찍으려면 개인의 의지력에 의존하기보다 강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마치 헬스장에 가야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게 되고, 도서관에 가야 책 한 줄이라도 눈에 들어오고,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야 일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쉼이라는 선택지밖에 없는 시스템 속으로 나를 내던져야 겨우 쉼 한 바가지를 길어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사바스와 가장 흡사한 시스템은 무엇일까?

문득 ‘호캉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비싼 돈을 내고,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가서, 1박2일 내지는 2박3일 동안 먹고 자고 싸기만 하는 그 위대한 현대인의 전유물, 호텔 바캉스.

물론 사바스가 추구하는 영적인 쉼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휴식이지만, 호캉스 역시 특정 목표를 위해 시스템에 나를 종속시킨다는 차원에서 사바스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우선 호텔에 가면 물리적으로 집과 분리된다.

청소를 하고 싶어도, 빨래를 하고 싶어도, 배달 온 지 2주째 구석에 짱박아 놓은 이케아 가구를 조립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수많은 선택지가 사라지고, 소수의 선택지만 남는다.

이 10평이 채 안 되는 공간에서 내게 허락된 것이라고는 잠을 자거나, TV를 보거나, 목욕을 하거나, 이 정도뿐이다.

강제적 쉼만 남은 셈이다.


배가 고프면 남이 해준 밥을 먹고,

밖에 잠깐 나갔다 오면 침구와 수건은 뽀송뽀송해져 있고,

좀 활동적이고 싶다 하면 몇 발자국 걸어 스파나 헬스장에 가면 된다.

내 집이라면 그래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되고, 계산하게 될 일들을 뒷걱정 없이 저지를 수 있다.

그렇게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오롯이 나를 위한 하루이틀을 보내고 오면 그래도 어딘가 조금은 채워진 느낌이 든다.




“놀 줄 알아야 노는 게 재밌는 거야.”

캣인더햇의 캣은 말한다.

쉼에도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쉬는 건 생각보다 졸라 어렵다.

쉴 줄 알아야 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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