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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May 23. 2016

따뜻함

싸락눈 같은 흰 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떨어질 때 느낀 것

깊은 밤 잠자리를 빠져나와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다.


작년부터 부쩍 밤새 뒤척이다가 선잠에 눈 뜨고 일어나 아침 먹는 날이 많아졌네. 그게 때로는 집수리를 잘 마무리하려는 세심한 궁리가, 때로는 부양가족에 대한 걱정이 번갈아 뇌리(腦裏)를 점령하기 때문이지.

오늘 새벽에 한국으로부터 온 전화에 놀라 일어나, 방뇨를 못하시는 어머니에게 방광암이 생긴 것 같아 수술을 해야 할지 어떨지 매형과 상의했네. 결론은 어머니께 별 효과 없었던 원인 치료를 위해 더 이상 큰 병원으로 가지 말고, 지금 계신 요양병원에서 투약으로 통증만 줄여 드리자는 것이었지. 치매와 합병증으로 쇄약 하시고 연세가 들어, 더 사신다고 해도 어차피 병석에서 거동을 못 하시고 고생만 하실 테니까 쉽게 의견을 모았던 것이네.

어머니의 삶이 수술로 연장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 주제넘고 이기적이라 온종일 마음이 불편해서,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면 생각도 멈출 줄 알았더니, 어지러운 마음이 몸을 쥐고 흔들어 잠이 오지 않네.

뭐 즐거운 얘기라도 지어내서 웃다가 잠들면 신나는 꿈도 꿀 수 있을 텐데... 이 한밤에 마님 깨워서 마음에 걸리는 얘기를 꺼낼 수도 없으니, 묵묵한 친구들에게 구린 속을 털어 내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까?

- 2015년 4월 11일, 내 마음에 풍선을 불어 주지 않을래?


다음 날...


신기하게도 오랫동안 묵묵부답하던 친구들로부터 답장이 와서, 모두에게 인사하고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 지난밤에 써 보낸 나의 변명에 편들어 주는 답장을 자꾸자꾸 읽으니 무거운 마음에 바람이 들어가 풍선껌이라도 불듯하다. 그런데 위를 쳐다보니, 어머니가 한 손에 풍선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고 계신다.


- 2015년 4월 13일, 풍선껌에도 바람을 불어넣으면 하늘로 올라가나?


1주일 후...


2015년 4월 19일 오래전에 예약해 둔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정오쯤 공항에 내려 바로 매형께 연락을 드리니, 전날 저녁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중이라고 하신다.


서둘러 영안실로 들어가 준비된 상복을 입고 문상을 맞하다가 오후에 입관식에 참석했다. 관에 들어갈 수의(壽衣)를 입힌 후에 만져 본 어머니의 얼굴은 곱지만 차가웠다. 염습이 끝난 후 장의지도사가 고인에게 드릴 말씀을 하라고 해서, 머뭇거리다가 어머니 귓전에서 노래를 불렀다 - 돌아가시기 전에 가톨릭 신자가 되신 어머니를 위해 가늘게 부르기 시작한 레퀴엠은 'Pie Jesu, Domine, dona eis requiem. Dona eis requiem...' 엄마 품에 속삭이는 아이의 흐느낌이 되었다.


다음날은 교회에서 장례미사를 보고 묘지에 가서 화장한 뒤에 유골함을 받아 산골장(뼈 뿌리는 곳)으로 갔다. 뼈가 아직 식지 않은 유골함을 열어서 한 줌 쥐고 있다가 살며시 손바닥을 폈다. 싸락눈 같은 하얀 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떨어진다. 따뜻하다. 마치 엄마 손을 쥔 듯이...


한 달 후...


조카에게,


할머니의 장례식이 네게 인생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고 했는데,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도 뭔가 가르쳐 준 것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인정'이다.


우리의 결혼식에 친구와 동생 모두 합해 네 명만 불러서 간소하게 올렸듯이, 네 할머니의 장례식도 허식 없이 우리 가족끼리 조용히 치르면 되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근자에 몇몇 장례식에 가 보니 사람이 너무 없으니까 좀 슬프더라. 할머니의 장례식은 사뭇 다르게 훈훈한 인정이 느껴져서 문상 오신 모든 분들께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 너희 조카들이 문상객을 받는 일에 여러모로 돕고, 장지에서도 운구하는 데 큰 일을 해 주어 더없이 고맙다.


이제 어머니는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가슴을 허전하게 할 정도로 내 마음속에서 떠나지는 않으셨다. 지난 30년 동안 부양하는 중에 어려움이 컸기 때문에 짐을 덜게 됐지만, 잘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평소에 어머니는 못 사는 딸 걱정이 크셨는데, 어머니가 바라시던대로 오랫동안 누나를 돌봐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날엔가 나도 나이 든 기분이 들고 주변 사람들도 갑자기 늙어 보이던데, 장례식 때 보니 네 아버님이 2년 전보다 무척 수척해 보이시더라. 효행이란 돌아가신 후에 제사상 잘 차려서 행할 게 아니라, 살아 계실 때 밥 한 술 따뜻하게 대접해 드려서 실천할 것이다. 생일날 뷔페식당에서 모이거나 효도관광 보내 드리는 것이 편한 세상이지만, 밖에서 남을 통해 드리는 것보다는 거동하실 수 있을 때 가끔씩 집에 모셔서 '인정'을 느끼게 해 드리는 것이 어떨까?


2015년 5월 24일, 삼촌



3년 전...


작년 3월에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부랴부랴 서울에 갔던 것이 어제 일 같은데, 그게 벌써 2년이 다 돼가네. 그동안 어머니께서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시고 노화가 가속되는 중에 치매 증상이 겹쳐서 가족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일차적인 부양 책임을 지고 있는데, 노인복지시설에라도 어머니를 의탁하지 않으면 달리 해결할 묘책이 없어서, 귀국하여 2주일간 긴급히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야 하네.


서울 가는 일이 아주 큰 일이고 서둘러 준비할 것이 많아서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네. 매번 그랬듯이 어머니 살림 정돈하고 생계 대책 마련하고 나면 바로 돌아와야 하니, 나이 먹고 실무 능력이 떨어져 조기 퇴직한 어려운 친구들조차도 만날 짬이 없을 것 같네. 나이가 드니까 연락이 끊긴 과거의 지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할 때가 많네. 언제 여유가 있을 때 '옛 친구들'을 만나, 각자 모르게 흘려보낸 과거 얘기도 하고, 살면서 체득한 철학도 논했으면 좋겠네.


이제 송년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가 되었으니, 장변을 늘여 놓아 여백을 어지럽히지 말고 끝을 맺어야겠네. 신년에는 가족 모두의 소망이 제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일이 꼭 노력에 비례하여 성취되지 않는 만큼 행운도 많이 따라 주기를 기원하네.


-2012년 12월 31일, 한 해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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