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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May 06. 2016

어린꿈

어릴 적에 품은 꿈으로 인생의 방향을 잡아도 되나요?

아내와 자식을 미국에 두고 혼자 한국에 돌아와 일하는 옛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연락했더니, 영락없이 삼십 년 전의 그 목소리가 들려와서 꽤 오랫동안 통화했는데, 말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더라. 그게 서로의 사정을 잘 모르고, 또 내가 오랫동안 한국말을 안 해 봐서 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전문 지식이 빈약하기 때문이었다.


전공에서 손을 뗀 지 꼭 15년이 지난 지금에 전자공학 전문가인 친구의 업무에 대해 가만히 듣고 대단한 일한다고 칭찬만 해도 손해 볼 게 없는데, 굳이 아는 척하면서 말을 더듬었으니 얼마나 우습냐? 나의 과학적 기틀이 벌써 오래전에 모두 무너지고 말았는데, 잠시 흩어진 단초(斷礎)를 찾아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까지 얹어 보이며, 아는 척한 것이 망측하여 통화 후에 금방 후회가 되더라.


나는 지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남의 얘기를 들으면 꼭 아는 척을 한다. 잘 아는 게 아니라도, 은근히 아는 척을 하다 보니 거기에 요령이 생겼다. 하지만 아는 척하면서 말장난하는 재미는 대화가 끝난 후에는 마음에 공허함만 더하는데, 오늘은 과거의 전공분야에 대한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나니 더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고 돌아 나온 그 길에 대한 아쉬움이 인다. 나도 계속 갔으면 지금은 멀리 와 있을 텐데... 하지만 이런 상상은 이내 자위의 반문으로 이어진다.


인생에는 여러 길이 있는데, 왜 젊을 때부터 한 길만 고집하고 그 길로만 가려하는가?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한 가지 일만 계속하면 새로운 선택에 필요한 주저 없이 시간 낭비하지 않고 빨리 갈 수 있으니, 사고만 없으면 한평생 살아 나가기에는 더없이 효과적이다. 이런 길에 들어선 사람은 꾸준히 가기만 하면, 대부분 남들로부터 성공했다는 말을 듣게 되고 자신도 만족한다. 벌써 오래전부터 여유 있는 부모들은 어린아이의 취향을 살펴보기도 전에 이것저것 가르쳐서 소질을 보이면, 꼭 한 방향으로 몰아서 교육을 시켰다. 이 결과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대회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모두 휩쓸어 갈 정도가 되어서, 한국인들의 예술적 기량이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훈련시켰기에 저기까지 갔을까?라는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기'를 원한다. 연구원이었던 나의 옛 동료들이나 친구들 중에는 '직장에서 받는 과제를 수행하기보다는 꼭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만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연구실을 운영하는 교수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회사가 제공하는 학자금을 받고 박사학위를 얻은 후에 몇 년 일해 주고 나서 교수가 된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교수가 되고서도 본연의 목적인 '하고 싶은 연구만 하는 것'까지 마음껏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위대한 인생은 꼭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남을 위해서 목숨 바쳐 헌신한 큰 인물들의 위대한 삶은 꼭 '하고 싶은 일을 한' 경우보다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도 '하기 싫은 일'을 역경 속에서 실행한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만 먹으면,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지 않아, 실컷 먹고도 영양실조에 걸릴 수가 있는 것처럼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일이다. 균형적인 삶을 외면하고 특출하게 살기 위해 좌우에 눈 한 번 주지 않으며, 단지 앞만 보고 인생의 외길을 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돌발사고를 만나 벼랑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일에 정열을 쏟으며 살다가 세계대전 등 개인적으로 불가피한 시대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해 실패하여,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어렵게 여생을 보내야 했던 ‘죠르쥬 멜리에스(이전 글: 마술사)’가 그런 경우인데, 지난 편지에 나는 그의 삶을 너무 낙관적으로 적은 것 같다. 사실 그는 마술사도 영화제작자도 아닌 얄팍한 연금수혜자로서 유산도 안 남기고 처절하도록 깨끗하게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유태인이었던 철학자 스피노자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철학이 아니라, 안경알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삶의 방편으로 마치 돌발사고에 대한 보험이라도 들듯이 아이들에게는 한 가지 이상의 직업교육을 시키는 유태인의 전통에 따른 결과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균형을 이루려면 하고 싶은 일만 하지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찾아서 해야 한다. 오직 성공을 위하여, 한 길로만 매진하는 것은 마치 인생을 일정한 괘도에서만 달리는 전차로 만드는 것과 같다.


나의 어릴 적 꿈은 위대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젊은 날을 과학자의 자격을 얻는데 모두 소비해서, 마침내 적당한 학력과 경력을 얻는데, 그 속에 푹 빠지기 전에 밖으로 왔다. 결국 '위대한 과학자'가 되려고 했던 어린 꿈이 조각나서 '작은 과학자'가 되어 있긴 해도, 아직까지 '위대함'을 위하여 한 길을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가끔씩 멋있게 잘 난 척을 못하고 말을 더듬기는 하지만...


오늘이 어린이날이라 애들처럼 말장난을 좀 했네.


- 2012년 5월 5일, 애들은 자야 크는데 말하고 장난하다 보니 밤이 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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