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인 이방인을 위한, 공항 음식

Insomnia_1:판다 익스프레스, 낯선 향의 쌀국수

by Munalogi
IMG_5909.JPG 판다 익스프레스의 플래터. 익숙하면서도 낯선 맛.

최종 행선지는 워싱턴 DC였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샌프란시스코(SFO)로 가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입국 심사는 악명(?) 높기로 유명했고 그 명성은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마 무시한 대기시간을, 끈적거리는 초여름 날씨 속에서 꼼짝없이 보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앞사람의 목에 짜증 나는 입김을 연신 뿜어내는 공룡이 된 채로. 그에 반해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고 정형화된 입국심사를 끝내고 내게 남은 것은 아직 Transfer 하기까지 12시간이 넘게 남은 비행기 티켓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식욕이었다.


비행기라는 공간에 탑승했다 내렸을 뿐인데, 내 눈앞에 다가오는 풍경들은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나를 워싱턴 DC로 데려다 줄 비행기가 오기까지는 나는 마치 또 다른 길고 긴 입국심사의 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까지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피로와 캐리어의 무게, 그리고 약간의 짜릿함을 느끼며 나는 공항 안의 음식점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참이고 메뉴판을 보며 환율 계산을 하다 그나마 눈에 들어온 곳은 판다 익스프레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음식점이라 조금 낯설었지만, 그나마 한국 음식이랑 비슷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직원이 추천하는 메뉴를 주문했다. 피곤함으로 나른해진 손길을 가진 직원에게서 내 식사를 쟁반 가득 받고 나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음식의 온도는 뜨뜻미지근했고, 덕분에 들척지근한 소스는 더욱더 끈끈하게 입에 달라붙었다. 탄력 없는 면은 입 안에서 부서져 내렸고 고기는 소스에 잠식당해 있었다. 나는 반 도 먹지 못 한 채 물림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내 주위의 사람들 모두 마치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내용 캐리어를 옆에 끼고 나와 비슷한 생김새의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얼굴 가득 정도가 다른 피곤함을 얹고서. 그들의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탐탁지 않은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앞으로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긴장이 풀리면서 동시에 무력감이 밀려왔다.


airport-802008_960_720.jpg x 나게 고독하구먼.

잠시 머무르는 곳으로는 공항도 나쁘지는 않지만. 나처럼 작정하고 시간을 죽여야 하는 transfer 족들에게는 공항은 참 희한하고도 적막한 곳이었다. 그것도 시설 좋기로 소문난 인천공항도 아닌 낯선 곳이기에 그런 느낌은 배가 되기 충분했다.


동행도 없었고, 더 이상 한국도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모든 짐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것이 불편한 의자에 익숙해져 어딘가 뒤틀려 버린 것 같은 몸을 잠시 산책시킬 때든, 화장실을 갈 때든, 공항을 둘러볼 때든 상관없이.(사실 공항에서는 누군가에게 짐을 맡기면 맡아주는 사람도 잡혀가기 딱 좋다.)


110V콘센트를 쓰기 위해 꽂은 Adaptor가 헐거워 몇 번이고 바닥에 타악 타악 떨어뜨려가면서도 전자책을 읽으며 나를 깨우기에 집중했다. 공항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고, 내가 가진 것이 내가 잃어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이었기에 강박처럼 졸린 눈을 비벼대야 했다. 워싱턴 DC에서의 화려한 계획들은 모두 다 잠시 접어두고, 대체 이 에어컨 바람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1분마다 한 번씩 하면서. 나의 낯선 새벽은 그렇게 건조하고 추웠으며 몽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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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고수향보다도 더 많은 향을 녹여낸, 그리고 내 마음도 녹여준 닭고기 쌀국수

드디어 내가 비행기를 타기까지 두 시간 남짓의 시간이 남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몸은 마치 급속 냉각시킨 동태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그런 약해진 몸에 피로는 더 효율적으로 스며들었고 에어컨 밑에서 건조해진 피부는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이대로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 안에서 감기에 걸려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마지막 식사를 하고 비행기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판다 익스프레스에서 먹었던 소스의 맛이 아직도 입 안에 남아있는 것 같기만 해서, 나는 그 어떤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쌀국수를 골랐다. 익숙한 향. 그러면서도 낯선 향이 내 피부에 스며들어 나를 조금씩 녹여주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체념과 설렘, 그러면서도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그들에게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동지애까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외국인이 된 채로, 여행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쌀국수를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입 안 가득 느껴지는 따스함에 나는 겨우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제야 다시 나만의 입국심사가 끝이 났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음식을 먹는 동안, 그리고 공항에서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공항의 일부였으며, 합법적인 외계인이었다. 공항 음식은 이런 나의 마음을 어느 정도 대변한 채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런 음식을 먹으며 여행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대하던 비행기에 오르며. 나는 다시 한번 공항을 뒤돌아보았다. 나를 차갑지만 품어준 공항. 돌아올 때는 또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음식을 먹으며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안녕.하고 나지막이 속삭이며. 나는 남은 피곤을 비행기에 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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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급식충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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