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과 영업의 두 얼굴
브랜드 기획자로 일하면서 가장 허무했던 순간은, 몇 달 동안 공들여 만든 프로젝트가
단 한 번의 회의에서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시장조사 자료를 모으고, 원가 협상을 하고,
샘플을 테스트하고, 패키지 디자인을 확정하는 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는 그 과정이 회사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막상 보고서를 들고 회의실에 들어가면 결과는 늘 예측할 수 없었다.
임원의 표정 하나, 대표의 한마디가 그 모든 과정을 허무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하고 나면,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내가 이렇게까지 애쓰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끝나고 나면 팀원들은 허탈한 웃음을 짓고, 협력사 담당자는
“그럼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라며 어색하게 묻는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건 없다. “죄송합니다. 내부 사정으로 프로젝트가 보류됐습니다.”
결국 몇 달의 노력이 ‘보류’라는 한 단어로 정리된다.
그런데 이상한 건, 회사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만든 기획이 사라져도, 회사는 여전히 돌아간다. 심지어 매출도 유지됐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회사에는 이미 튼튼한 영업망과 유통 채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다니던 회사의 중국 왕홍(網紅) 채널은 매출을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기반이었다.
새로운 기획이 무산되어도, 기존 유통망을 통한 판매는 꾸준히 이어졌다.
신입시절,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약간 혼란스러워 했다.
기획이야말로 회사의 심장이라고 믿었는데, 현실은 영업이 회사를 살리고 있었다.
한동안은 내 존재 의미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없어도 회사가 잘 버티는데, 굳이 내가 기획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시각이 열렸다. 영업이 없으면 당장 회사는 무너진다.
유통망은 회사의 혈관이고, 영업은 그 혈관을 따라 돈을 흐르게 하는 심장이다.
하지만 기획이 없으면 결국 회사는 성장하지 못한다. 당장의 매출은 유지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소비자에게 외면받는다. 소비자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원하고,
경쟁사는 쉼 없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기 때문이다.
한편, 기획만으로는 절대 회사를 살릴 수 없다는 것도 뼈저리게 배웠다.
기획이 아무리 참신하고 완벽해도, 영업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장에 자리 잡지 못한다.
진열대에 올라가지 못한 제품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소비자가 볼 수 없는 브랜드는
아무리 뛰어난 스토리를 갖고 있어도 결국 실패한다.
내가 다녔던 그 회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여러 차례 기획이 엎어졌지만, 중국 왕홍 채널을 중심으로 한 판매망이 회사를 살려냈다.
반대로, 영업만으로 버티다 보니 회사는 점점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지 못했고,
젊은 소비자에게는 매력이 떨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기획과 영업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없다.
두 축이 동시에 맞물려야만 회사가 제대로 굴러간다.
그래서 나는 점점 태도를 바꾸었다. 더 이상 내 기획이 회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과잉된 책임감에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영업팀과의 협업을 중시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 콘셉트가 영업 채널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중국 왕홍이 좋아할 만한 스토리인지, 올리브영 매대에서 눈에 띌 수 있는 패키지인지,
온라인 상세페이지에서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인지. 기획은 결국 영업과 연결될 때만 힘을 가진다.
나는 지금도 가끔 초창기 나를 떠올린다.
그때의 나는 늘 “내 기획이 회사를 바꿀 거야”라는 자부심과 동시에,
프로젝트가 무산될 때마다 “내 기획이 무의미하다”는 좌절 사이를 오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브랜드를 빛내는 건 기획이고, 회사를 지탱하는 건 영업이라는 사실을.
기획자는 브랜드의 얼굴을 만드는 사람이고, 영업은 그 얼굴을 세상 앞에 내보이는 사람이다.
두 가지가 함께할 때만 비로소 브랜드가 살아남는다.
내가 배운 1문장
브랜드를 빛내는 건 기획, 회사를 지탱하는 건 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