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맞추는 순간, 기획은 현실이 된다
브랜드 기획자라는 직업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주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책상 위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현실로 끌어내려면 반드시
제조사와 마주 앉아야 한다. 스펙, MOQ(최소 주문 수량), 리드타임, 원가를 오가는 대화는
결국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나는 초창기에 그 언어를 몰라 낭패를 본 적이 많았다.
원료를 이것저것 넣으면 좋은 제품이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제조사 회의실에 앉아
견적서를 받아 들었을 때, 종이 한 장이 내 꿈을 단숨에 깨뜨렸다.
충진비, 인쇄 단가, 금형 비용, 리드타임까지 줄줄이 붙은 숫자들은 현실을 가차 없이 보여주었다.
“원가가 이 정도면 판매가는 최소 ○○원대 이상으로 가야 합니다.”
담당자가 건넨 말에 나는 당황했다. 머릿속의 그림은 화려했지만,
실제 협상 테이블 위에서는 단 하나도 현실화되지 않았다.
기획의 절반은 협상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제조사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다. 계약서의 단어 하나,
용기 재질의 선택 하나가 결과를 좌우했다.
“이 용기는 기본 용량이 적어서 MOQ 기준 5만개 입니다.”라는 말은
곧 “소규모 생산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 그 의미조차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제조사의 언어를 배워갔다.
원가표를 받을 때는 상단보다 하단부터 보았다.
충진비와 포장비, 라벨 인쇄 단가가 어디까지 줄어들 수 있는지,
용기 형태나 용량을 다르게 하면 MOQ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까지.
사소해 보이는 단어 하나가 수백, 수천만 원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다.
한 번은 선케어 제품 프로젝트에서였다. 디자이너는 고급스러운 느낌을 원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후가공으로 무광 코팅을 입힌 제품을 보여주며 진행 방향을 제안했다.
이렇게 디자이너가 원하는 무드는 살릴 수 있었다. 협상은 결국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진행 방향을 찾는 과정이었다.
반대로 협상을 실패한 기억도 있다. 제조사 미팅 자리에서 공장 담당자가 “리드타임 2개월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출시 일정 역시 이미 두 달 안에 출시를 목표로 짜여 있었다.
서로의 언어가 맞춰지지 않은 채 프로젝트는 출발했고, 결과적으로 광고는 먼저 나가고 제품은 한 달 늦게
출시됐다. 그 공백은 매출 손실로 이어졌고, 나는 “왜 일정이 맞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받아야 했다.
사실 문제는 나의 무지였다. 제조사가 말한 리드타임은 생산 공정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고,
포장재 수급과 심의 절차 등 여러 변수를 포함하면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협상 자리에 들어갈 때마다 반드시 세 가지를 준비했다.
첫째, 목표 원가 역산표. 소비자가격에서 거꾸로 내려온 구조를 먼저 정리해 두어야 했다.
둘째, MOQ와 리드타임의 시뮬레이션. 여러 시나리오를 준비해 두면 협상장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제조사의 관점에서 본 장점과 리스크. 그들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협상이 대화로 풀린다.
제조사와의 협업은 언제나 긴장감을 동반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실질적인 배움의 순간이기도 했다.
기획자는 멋진 아이디어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과 타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계약서 문장 하나, 단가표의 숫자 하나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기획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순간은 대부분 협상 테이블에서 찾아왔다.
아이디어를 화려하게 꾸미는 순간이 아니라, 현실의 언어를 배우고, 서로의 세계를 연결할 때였다.
그때 기획은 비로소 살아 움직였다.
내가 배운 1문장
좋은 기획은 좋은 협상 위에서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