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쌓은 경험, 기계가 보여준 한계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 브랜드를 기획해 왔다.
수많은 실패와 약간의 성공,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실험 속에서 얻은 건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내 책상 위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바로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파트너가 등장한 것이다.
기대와 환상
처음 챗GPT를 접했을 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브랜드 네이밍이나 카피라이팅은 AI가 다 해주겠구나.”
질문 몇 개만 던지면, 순식간에 수십 개의 이름 후보와 문구가 쏟아졌다.
“효율이 이렇게까지 높아질 수 있구나”라는 환상이 생겼다.
심지어 사내 회의에서 AI가 만든 결과물을 보여주자, 몇몇 동료들은 감탄하기도 했다.
“이제 네이밍은 AI에게 맡기면 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 결과물을 곱씹어 본 순간부터, 문제는 드러났다.
이름들은 그럴듯했지만 너무 일반적이었다. 이미 다른 브랜드에서 써왔거나,
검색만 해도 흔히 나오는 단어들이었다. 예컨대 내가 직접 만들어낸 ‘ROOO’이나, 화장품 프로젝트에서 고민 끝에 탄생시킨 ‘POOO’, ‘GOOO’ 같은 이름은
브랜드의 철학과 타깃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AI가 뽑아낸 이름에는 맥락과 공기, 사람 냄새가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AI는 어디까지나 후보를 풍성하게 던져주는 도구일 뿐,
최종 선택과 책임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을.
데이터의 함정
AI를 데이터 분석에 활용했던 경험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새로 부임한 팀장이 특정 제품군의
누적 매출 추정치를 요구했다. 나는 챗GPT와 구글 AI를 동시에 활용해 공식을 만들고,
쿠팡 리뷰 수를 기반으로 매출을 추정하는 표를 그럴듯하게 작성했다.
보고서는 그럴싸해 보였지만, 문제는 내가 그 수식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회의에서 팀장이 물었다.
“이 수치의 근거는 뭐죠? 리뷰율 가정은 어떻게 적용했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AI가 계산해 준 수치를 가져왔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라는 어떤 철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보고서를 제출하긴 했지만, 스스로도 껍데기만 남은 기획자가 된 기분이었다.
결국 신뢰는 데이터 그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데이터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에서 나온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빠르지만 공허한 결과물
AI는 속도를 높여주었다. 자료를 정리하고, 참고할 만한 트렌드 키워드를 모으는 데는
확실히 도움이 됐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 AI가 제시하는 문장들은 매끈하지만 공허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단순히 보기 좋은 설명이 아니라, 브랜드의 맥락과 스토리가 녹아 있는 언어였다.
예를 들어 리포좀 비타민 제품을 설명할 때, AI는 “흡수율이 높다”는 기능적 표현만 반복했다.
하지만 내가 현장에서 느낀 건 달랐다. 소비자는 단순히 ‘높은 흡수율’이 아니라,
‘내 몸에 더 잘 들어온다’는 확신과 안도감을 원했다.
AI가 건네는 문장 속에는 그런 체감의 결이 빠져 있었다.
협업의 새로운 풍경
이 시리즈를 쓰면서도 AI와 나는 협업을 했다. 나는 경험을 이야기했고, AI는 구조를 잡아주고 문장을 다듬어 주었다. 때로는 AI가 너무 매끄럽게 다듬어버려서, 오히려 사람 냄새가 사라진 것 같아 일부러 문장을 다시 거칠게 고쳐 쓰기도 했다.
예컨대 내가 “실패”라고 표현한 부분을 AI는 “시행착오”라고 바꿨다. 더 완곡하고 세련된 표현이었지만, 내가 겪은 감정의 날카로움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그 표현을 다시 “실패”로 돌려놓았다. 브랜딩은 결국 사람의 감정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획자의 자리
결국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AI는 효율을 준다.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일, 책임을 지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소비자의 미묘한 표정, 불편을 말하지 않고 드러내는 몸짓,
협력사의 주저하는 목소리 속에서 얻어낸 감각은 AI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다.
앞으로 기획자의 역할은 달라질 것이다. 과거처럼 모든 걸 직접 떠안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어떻게 활용할지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 즉 경험과 직관, 실패에서 나온 성찰을 더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나는 여전히 기획자가 AI에 의해 대체된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AI와 함께 일할 줄 아는 기획자만이 살아남는다고 본다.
기계가 던져주는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는 결국 사람의 몫이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장을 쓰며, 나는 내 책상 위 풍경을 떠올린다.
모니터 속에는 AI가 제안한 수십 개의 이름 후보가 떠 있고,
옆에는 내가 지난 실패에서 배운 기록들이 놓여 있다. 둘은 대조적이지만, 동시에 보완적이다.
내가 배운 1문장
브랜드는 사람이 쌓은 경험에서 태어나고, AI는 그 경험을 비춰주는 거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