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5에서 온 엽서 >

스마트시티에서 길 잃다

by 톨루엔

침 횡단보도에서 ‘삑—삑—’ 소리가 빨라졌다.

신호등 기둥의 얇은 화면에는 오늘의 권장 보행 속도: ↑라는 아이콘이 떴다.

비가 막 그쳐 노란 타일이 반짝였다.

나는 유모차를, 엄마는 보행 보조차를 밀었다.

“천천히 가자.”

내가 말하자, 엄마가 웃었다.

“천천히가 요즘 제일 어려운 말이더라.”

파란 버튼이 멀리 보였다. 손을 뻗기엔 높았다.

평균을 맞추라는 도시 앞에서, 우리는 매번 아주 조금 길을 잃는 법을 배운다.




집 앞 스마트쉘터의 화면에는 늘 경로가 떴다.

빠른 길, 조용한 길, 그리고 최근 업데이트된 안전 평균 경로.

화살표는 비슷한 색이었고, 속도 아이콘만 달랐다.

우리는 오늘 구청에 가야 했다.

엄마의 보행 보조차 휠을 교체하려면 현장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빠른 길이면 16분, 평균 경로면 19분, 느린 길은 26분.”

내가 읽자, 엄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느린 길은 왜 느려?”

“계단 피하고, 경사 완만한 데로 돌아가서.”

“그럼 그게 빠른 길이지.”

엄마 말은 늘 정확했다.

느리게 가도 덜 멈추는 길이 결국 빠르다는 사실을, 도시는 맨날 잊는다.

나는 쉘터 바닥에 떨어진 동전 100원을 줍고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의 회귀 모티프였다. 작고 둥근 것 하나.




첫 번째 코너. 화면은 ‘무단차’로 표기했지만, 발끝에선 모서리가 느껴졌다.

보조차 앞바퀴가 ‘툭’ 걸리고, 엄마가 몸을 앞으로 쏠렸다.

“괜찮아?”

“응. 별로.”

보행자 AI 스피커가 기둥에서 조용히 안내했다.

“이 구간 평균 통과 시간 13초. 개인 속도에 맞춰주세요.”

엄마가 키득했다.

“개인 속도는 내가 정하는 거지, 기둥이 정하는 게 아니고.”

나는 유모차 안의 아이에게 젖병을 건네고, 보조차 손잡이를 더 꽉 쥐었다.

보행로 위 작은 LED가 초록에서 파랑으로 바뀌었다.

‘평균 이하’라는 뜻이었다. 색의 예의 바른 불친절.




대로변 횡단보도 앞, 적응형 신호가 차량 흐름에 맞춰 바뀌었다.

초록의 남은 초가 갑자기 줄었다. ‘삑—삑—삑—’ 간격이 촘촘해졌다.

등 뒤에서 전동 킥보드가 브레이크를 긁었다.

“앞으로 가시죠.”

보행안내 요원이 손짓했다. 노란 조끼에 FLOW라고 적혀 있었다

(문자인 줄 알았고, 흐름이라는 뜻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잠깐요. 엄마, 괜찮아?”

엄마가 보행 보조차에 몸을 싣고 천천히 내딛었다.

모차 앞바퀴가 흰 선을 끌고 지나갔다.

뒤에서 킥보드 운전자가 툭 한숨을 쉬었다.

‘평균 속도 보행 구간입니다’라는 안내음이 스피커에서 또렷하게 흘렀다.

평균을 지키라는 말은 종종 누구를 기다리지 말라는 뜻과 닮아 있었다.




다음 블록에서 화면은 우리에게 느린 길 권장 배지를 띄웠다.

화살표가 골목으로 꺾였다.

대로의 신호 주기가 짧다며, 보행 약자에게는 우회가 더 안전하다고 했다.

“멀리 돌아가면 늦는데?”

“안전하대.”

“안전하다고 늦으라는 건, 너 보고 점심 굶으라는 소리랑 같아.”

엄마가 중얼거렸다.

그때, 마을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기사님이 창문을 열고 외쳤다.

“저 골목 오늘 공사예요! 돌아가면 더 막혀요!”

앱은 조용했고, 사람은 소리쳤다. 우리는 눈으로 합의를 했다.

대로를 그냥 건너 구청 쪽으로. 킥보드 한 대가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유모차를 안쪽으로 붙였다.

킥보드 뒤에 ‘평균 도달’ 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도시의 칭찬은 빠름에게 후했다.




엽서 사진. 바닥에 흩어진 흰 선 조각들 사이로 파란 점선이 이어져 있다.

느린 길(권장)이라고 손글씨가 흐릿하게 적혔지만, 누군가 그 위에 연필로 다른 말을 덧썼다.

사람 길. 모서리가 눅눅해져 잉크가 번졌다. 엽서 뒤에는 짧은 문장.

지도는 평균을 그리고, 발은 각자를 그린다.




구청 1층 안내판 옆 카페에서 친구 서진을 만났다.

그는 도시데이터팀에서 일한다.

“적응형 신호, 요즘 민원이 많지?”

내가 묻자, 서진은 커피를 휘저으며 말했다.

“차량 흐름이랑 보행 흐름을 같이 봐야 하는데, 학습 데이터가 보행 쪽에서 편향돼 있어."

"출근시간 기록이 많거든. 그때 보행 평균이 빨라.”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아침 사람이 아닌 사람은 도시에서 매일 지는 거네.”

엄마가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끼어들었다.

“우리 같은 사람 데이터도 있는 거지?”

“있지. 근데 숫자가 작아. 그래서—”

서진이 멈칫했다.

“알고 있어. 작은 숫자가 사람일 땐, 작다는 말이 변명이 되면 안 되지.”

그는 화면을 열어 보행 지원 요청 버튼 위치를 보여줬다.

기둥 중간, 유모차 손잡이보다 높았다.

“이건 왜 이렇게 높아?”

서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파손 방지 겸… 음.”

“낮추면 되잖아.”

엄마가 간단하게 말했다. 틀리지 않은 말은 가끔 계획보다 빠르다.




구청 민원 창구는 생각보다 빨랐다.

보조차 휠 교체 승인 도장이 ‘또각’ 찍혔다.

종이 영수증과 비슷한 감열지에 시간이 인쇄됐다.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 몇 개가 더 떨어졌다.

바닥의 흰 선이 물에 젖어 약간 부풀었다.

유모차 앞바퀴가 물길을 그렸다.

“잠깐 쉬었다 가자.”

벤치에 앉아 엄마에게 따뜻한 물을 건넸다.

벤치 옆 기둥의 화면이 우리를 인식했는지 휴식 지점 아이콘을 띄웠다.

드물게 친절한 알림이었다.

“오늘은 네가 고집을 잘했네.”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더 고집했지.”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닮아갔다.

느린 길을 걸을수록, 서두르지 않는 사람들이 보였다.

카고바이크 뒤 좌석에 잠든 아이, 우산을 포개 든 노부부, 개를 안고 신호를 기다리는 소녀.

도시의 보폭은 생각보다 넓었다.




돌아오는 길, 또 다른 기둥 앞에서 멈췄다.

보행 지원 요청 버튼이 여전히 높았다.

엄마가 발끝으로 일어섰지만 닿지 않았다.

“그냥 기다리자.”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아까의 100원을 꺼내 굴려봤다.

동전은 둥글고, 버튼도 둥글었다.

엄마가 웃었다.

“그걸로 누르라는 거니?”

“아니. 그냥… 둥근 건 다 비슷해 보여서.”

그 말이 우스워서 더 오래 남았다.

나는 유모차 손잡이를 잠깐 엄마에게 맡기고, 양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기둥 아래 LED가 번졌다.

보행 시간 연장.

엄마가 박수 치듯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이게 도시에서 박수치는 법이네.”

그 순간, 옆 건물 관리인이 현관 문턱에 고무 경사판을 끼우고 있었다.

“요청 들어와서 깔아요. 낮은 게 좋죠.”

그는 말끝을 길게 늘였다. 낮추면 되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앱은 계속 대로를 권했지만, 우리는 골목을 골랐다.

비를 피한 빨랫줄 아래로 노끈이 살짝 늘어졌다.

동네 분식집 앞에 스티로폼 상자가 쌓여 있었고, 주인이 발로 살짝 밀어 길을 내줬다.

“천천히 가요.”

사람의 안내는 숫자가 없어서 좋았다.

유모차 바퀴가 오래된 벽돌의 숨을 밟았다.

엄마의 보조차가 작은 구멍을 피해 곡선을 그렸다.

골목은 지도에 없는 단어로 가득했다.

잠깐만요, 천천히, 먼저 가세요.




집이 가까워지자, 큰 사거리에 새 전광판이 달려 있었다.

보행 평균 속도 상향 테스트라는 문구가 돌았다.

사람들의 발걸음 영상이 희미하게 겹쳤다. 서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오늘 피드백 고마워. 다음 패치에 요청 버튼 위치 내리고, 느린 길 문구 바꿔볼게.

— 뭐로?

— 사람 길.


나는 웃었다. 엄마가 화면을 올려다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평균을 높이는 게 목적이 아니고, 제각각을 살리는 게 목적이어야지.”

전광판은 내 말을 못 듣는 척했다. 대신 바로 밑 신호등의 삑 소리가 유난히 또렷해졌다.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한 번 더 떨어졌다.




집 앞 마지막 신호. 파란 버튼은 여전히 높았지만, 이번엔 사람이 있었다.

앞서 가던 청년이 뒤를 돌아보고 묻지도 않고 버튼을 눌러줬다.

“고맙습니다.”

“네.”

안도의 시간만큼 초록이 길었다. 유모차 바퀴가 흰 선을 부드럽게 건넜다.

엄마가 작게 중얼거렸다.

“평균을 배우느라 내가 늦었나, 제각각을 배우느라 네가 늦었나.”

나는 웃었다.

“둘 다 조금 늦었지.”

현관 키패드가 ‘삑’ 하고 반겼다. 비닐우산에서 물이 또각또각 떨어졌다.

주머니 속 100원이 손끝에 만져졌다. 작고 둥근 것 하나가 오늘의 좌표가 되어준 날이었다.




저녁, 창밖 대로의 신호가 리듬을 바꾸는 걸 보며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균 속도는… 결국 관리의 언어잖아. 근데 길은 관리만으로 안 만들어지지.”

서진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맞아. 평균은 아무도 아니면서 모두인 사람을 상정해. 한편으론 누군가를 항상 바깥으로 밀어내지.”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일부러 골목으로 갔어.”

“길을 잃었네?”

“응. 근데 사람을 찾았어.”

서진이 웃었다.

“그거 기록해야겠다. ‘길 잃기’도 데이터지.”

“그럼 기록에 ‘사람 길’도 넣어줘.”

“넣을게. 그리고 버튼, 낮출게. 쉬는 지점도 더 촘촘히.”


전화를 끊고 나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바람이 커튼을 밀었다 당겼다.

이 도시는 표지판과 버튼, 스피커와 전광판으로 가득하지만, 결국 누가 옆에서 누르는지로 달라진다.

길을 잃는 기술은 알고 보니, 평균을 잊고 서로의 속도를 고르는 기술이었다.

오늘 우리는 그걸 한 단락 배웠다.




평균이 그린 지도에서 한참을 헤맨 끝에,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도착했다.

다음번 신호 앞에서는 버튼보다 먼저—서로를 먼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