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5에서 온 엽서 >

데이터 라벨러의 하루

by 톨루엔

아침 첫 알람을 스누즈로 밀어두자, 두 번째 알람이 떴다.

감정 상태: 불안 0.38, 피로 0.71 — 수분 섭취 권장.

손목이 친절하게 점수를 주는 시대에, 나는 숫자 대신 단어를 붙여 먹고산다.

라벨러—낯선 목소리, 흐릿한 얼굴, 잘린 문장에 정답 스티커를 붙이는 일.

책상 위 작은 원형 스티커가 오늘의 회귀 모티프였다.


노란 점 하나.

“기쁜가/슬픈가/화난가/중립.”

나는 내 감정에는 아직 스티커를 붙이지 못한 채 현관 키패드에 ‘삑’을 찍었다.




사무실이 아니라 집 방이 출근지였다.

모니터를 켜면 플랫폼이 자동으로 태스크를 배분한다.

할당: 120개 / 예상 소요 3.5시간 / 화자 감정 4클래스 / 유해 표현 2등급.

헤드폰을 꽂자, 세상은 덜컥 줄어들었다.


첫 클립: “야, 그거 진짜 미쳤다.”

가이드라인은 친절했다. 욕설일 가능성, 친한 농담일 가능성, 맥락 없음일 가능성.

가능성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사람의 표정은 사라졌다.

나는 체크박스를 눌렀다.

정서: 즐거움(농담) / 유해: 0.

클릭 소리에 맞춰 노란 원형 스티커가 손끝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스티커는 화면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잘 붙었다.



두 번째 클립은 채팅 캡처였다.

“그게 말이야 방구야.”

가이드는 은유적 욕설-경도에 체크하라고 권했다.

단가는 건당 120원, 1초 망설이면 손해였다.

‘은유적 욕설’이라는 말이 웃겼다. 욕은 욕인데, 문학점수를 받은 욕.

나는 살짝 씁쓸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머그컵 바닥에 커피 링이 생겼고, 그 위에 노란 스티커가 똑— 붙었다.

중립. 머그컵이 중립이라는 판정이 우습지만, 내 손목의 피로 0.71은 나를 웃지 않게 했다.


세 번째 클립: “그날, 나도 너처럼…”

뒤가 잘려 있었다. 잘린 끝을 사람이 메우는 일, 오늘도 내 일이었다.



플랫폼 상단에 QA 리마인드 - 지난주 정확도 93%가 반짝였다.

95% 아래면 보너스 컷. 숫자는 친절했고, 친절한 숫자는 가끔 폭력이었다.

‘정답’은 가이드라인과 감정 모더레이터의 합의로 정해진다.

그 합의가 언제나 옳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옳음보다 일치로 월세를 냈다.

창가의 화분 잎이 말라 구겨져 있었다. 노란 스티커를 한 장 떼어 잎사귀에 붙였다.

중립. 식물이 중립이라는 판정은 더 우스웠다.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도, 마우스는 멈추지 않았다. 클릭은 밥이니까.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 시장 갔다가 근처면 들러라. 미역국 끓였다.

— 오늘 마감… 오후에 갈게. (라고 쓰고 지웠다)

바로 그때, 긴급 태스크: 자살 암시 발화 판별(추가 단가 30%)가 떴다.

전보다 높은 단가, 전보다 무거운 판단.

헤드폰 너머로 숨을 참고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없어져 버리면.”

가이드는 직접적 의도 vs. 정서적 과장을 구분하라고 했다.

숫자가 아닌 문장 사이의 공기를 라벨링하는 일.

화면은 깨끗했고, 내 방 공기는 조금 불결해졌다. 나는 체크했다.

자살 암시: 경계 / 조치: 도움말 배너 노출.

문자창이 깜박였다.

— 엄마 말고, 사람 밥 먹고 가.

엄마가 보낸 두 번째 메시지였다.

사람 밥. 라벨에 없는 단어가 가슴에 붙었다.




작은 우체통 안쪽에 누군가 접어 넣은 엽서.

앞면은 노란 원형 스티커들이 흩뿌려진 정물 사진, 뒷면엔 짧은 문장.

세상은 라벨로 설명되지만, 사람은 라벨을 달고도 남는다.

모서리가 닳아 스티커 접착이 느슨해졌다.

몇 개는 이미 떨어져 바닥에 붙어 있었다. 바닥도 ‘중립’일까.




이어폰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 젊은 남자가 말했다.

“괜찮다고 했잖아.”

다음 줄, 여성의 짧은 한숨.

가이드라인은 가스라이팅, 불균형 권력관계 항목을 보여줬다.

문장은 세 문장뿐이었고, 권력은 화면 밖에 있었다.


나는 과거의 한 통화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 엄마의 느린 대답.

스무 살 이전의 나는 아무 라벨도 몰랐고, 스무 살 이후의 나는 라벨로만 세상을 버텼다.

나는 체크박스를 천천히 골랐다.

정서: 불안 / 폭력성: 언어-경도 / 관계: 불균형 가능.

확신이 아니라 가능성. 가능성을 붙여놓으면, 누군가는 그 위에 정밀한 말을 얹을 수 있다.

오늘의 내 몫은 첫 단어였다.




점심 알림이 울렸다. 집중 120분 달성, 휴식 권장.

나는 노란 스티커북을 열어봤다.

작고 둥근 스티커들 사이에 흰색 빈 원이 섞여 있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스티커.


창문을 열자 비가 아주 가늘게 왔다. 라면물을 올려두고, 택배 박스를 뜯었다.

버섯 가죽 샘플, 반품된 신발, 수선표가 들어 있는 박스.

동네 공방에서 주문한, 어제 밤 늦게 결제한 그것의 영수증이 구겨져 있었다.

환불 불가.

어떤 라벨은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노란 스티커 하나를 뜯어 냉장고에 붙였다.

오늘 저녁: 엄마 집(사람 밥)—글자는 머릿속에만 적었다.

실제 스티커는 백지 그대로였다. 빈 라벨로 약속하는 법을, 오늘 처음 시도했다.




오후 태스크는 영상 캡션 감정분류였다.

10초짜리 리액션, “헐 진짜 대박” 같은 문장들을 기쁨/놀람/과장으로 나눈다.

연속으로 40개를 붙이고 나니, 화면의 표정과 내 표정이 동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웃지도 않는데 기쁨을 누르고, 놀라지 않는데 놀람을 누른다.

그때 QA 팝업이 떴다.

품질 점검: 당신의 라벨과 골드 정답이 6개 불일치.

빨간 점 여섯 개가 별자리처럼 박혔다.

— 재검토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나는 예를 눌렀다. 다시 들으니 ‘대박’의 억양이 약간 지친 쪽에 더 가까웠다.

기쁨→피곤한 기쁨(과장)으로 수정.

플랫폼엔 피곤한 기쁨 버튼이 없어서 중립과 놀람 사이를 맴돌다, 결국 놀람-약함으로 절충했다.

사람의 감정 폭이 분류표 바깥으로 넘칠 때, 우리는 탁자 아래로 흘러내린 커피처럼 휴지로만 닦을 수 있었다.




오후 네 시, 중간 정산 알림이 떴다.

오늘 수익 170,280원(세전).

손목은 혈당 안정을 칭찬했고, 잔액 알림은 버스비와 비슷한 금액을 칭찬하지 않았다.

잠깐 밖으로 나가 계단을 걸었다.

비 냄새, 젖은 페인트, 지하 주차장의 둔탁한 반향. 라벨 없는 냄새들이 머릿속을 씻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갈게. 오늘은 진짜.”

“진짜 안 와도 괜찮다.”

“아니, 오늘은 스티커 붙였어.”

“뭐?”

“아니, 말이야.”

엄마는 웃었다.

“사람 밥 하려면 김치전부터 부쳐야지.”

나는 내려가는 계단 난간의 차가움을 손바닥으로 오래 눌렀다.

결정이라는 단어를 손에 붙이는 연습.




다시 책상. 남은 태스크 35개. 첫 줄부터 슬픔이었다.

“그냥,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미세한 떨림, 말끝이 가장 높은 음으로 올라갔다가 급히 내려오는 패턴.

가이드라인에는 없었지만, 나는 ‘화난 슬픔’이라는 내 사전을 펼쳤다.

분류표에는 분노/슬픔/중립 세 칸뿐이었고, 나는 슬픔을 누른 뒤 코멘트에 적었다.

분노+슬픔 경계 (말끝 상승)

QA가 다시 팝업 : 코멘트 과다, 속도 저하.

— 코멘트 없이 진행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나는 눈을 감았다 뜨고 아니오를 눌렀다.

느리게 벌던 날은 늘 있었고, 오늘은 그런 날로 남겨도 괜찮았다.

내일의 속도가 오늘의 슬픔의 억양을 구해주지 못한다면, 오늘만큼은 내가 구해야 했다.




마지막 태스크가 떴다. 개인 사진 캡션/감정 분류.

화면에는 식탁 위 종이 영수증 두 장과 젖은 머그컵, 그리고 막 지운 빨간 립스틱 자국이 찍혀 있었다.

캡션은 “어제의 흔적”.

가이드라인: 소유관계 불확실, 감정 추정 금지.

그럼에도 플랫폼은 기쁨/슬픔/그리움/중립 네 칸을 제시했다.

나는 오래 망설였다.

사진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사람이 나와 있었다. 부재가 감정을 만드는 방식.

그때 카카오톡이 울렸다.

— 야, 이 사진 너지? (친구가 보낸 링크)

링크를 열자 어느 SNS에서 떠도는 이미지였다.

구도, 물자국, 영수증의 접힌 선까지 똑같았다.

과거 어느 날, 내가 찍은 사진이었다.

자취방 이사 전날, 혼자서 남은 밤.

나는 웃음이 나왔다.

플랫폼은 내 감정을 묻고 있었고, 나는 답을 모른 척했다.

손목이 살짝 진동했다. 감정 상태: 안정 0.62.

나는 캡션을 그리움으로 선택하고, 내 기록에도 스티커 하나를 붙였다.

노란 원. 아무 글자 없는 빈 스티커.

채워졌는데 비어 있는 표식. 그게 오늘의 나였다.




나는 남의 감정을 붙들어 단어로 만들며, 내 감정에는 빈 스티커를 붙였다.

내일 누가 물으면 이렇게 답할것이다.

“설명은 나중이고, 오늘은 그냥 사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