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맹학교에 입학했던 중학교 1학년 학년초의 어느 날이었다.
수업시간에 와서는 안 되는 신호가 내 뱃속 깊은 곳에서 오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교실을 벗어난다는 것은 학생의 도리가 아니라고 굳게 믿던 난 왕성한 신진대사를 억누르기 위한 식은땀 나는 인고의 시간을 택했다. 그러나 그 인내의 시간은 45분 수업시간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항복 선언'으로 끝이 났다.
선생님께 최대한 죄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공손한 말투로 나에게 교실을 벗어나야만 하는 사정이 발생했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별다른 꾸지람 없이 친절하게 복도 중간쯤 위치한 화장실까지 손수 안내를 해 주셨다.
절박한 위기를 벗어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안도감이 찾아왔고 세상을 다 가진 이가 누리는 행복함도 찾아왔다. 들어올 때 와는 다르게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내가 어느 쪽에서 온 지가 도저히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위치는 하필이면 복도의 거의 한 중앙이고 양쪽에서는 비슷비슷한 교실들의 소리만 들렸다.
입학한 지 몇 달이라도 지났다면 선생님의 음성으로라도 구분이 되었을 텐데 난 입학한 지 며칠도 되지 않은 찐 신입생이었다.
게다가 실명하고 보행훈련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는 내겐 정교한 방향감각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왼쪽 끝으로 갔다가 오른쪽 끝으로 갔다가 몇 번을 반복해도 내가 있던 교실이 어디였는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낯선 건물에 뭔가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은 걸음속도도 느릿느릿하게 만들고 있어서 수십 번은 왔다 갔다 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겨우 한 두 번 정도 왕복을 했을 뿐이었다.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부르시는 선생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겨우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난 볼일이 좀 오래 걸렸을 뿐 하나도 헤매지 않았다는 척을 하며 들어왔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조차도 내가 얼마나 허둥대고 고생을 했을지 다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난 교실문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는 것도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에 식당을 갈 때도, 체육수업이나 음악수업시간에 이동수업을 할 때도 난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거나 헤매거나를 반복했다.
다른 친구들에겐 일상적인 움직임들이 내겐 한순간 한순간 도전이었다.
작은 건물 내에서도 그럴 정도였으니 운동장을 내려가거나 그 옆에 있는 공중전화를 혼자 찾아가는 건 이번 생 안에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한 학기가 지나고 학년이 바뀌어갔다.
수백 번 교실을 옮겨 다니고 수천번쯤 화장실을 찾아가면서 내게도 익숙함이라는 감정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급한 볼일이 생기면 살짝 달려보기도 하고 배가 고플 때엔 학교에서 몇 골목은 떨어져 있는 떡볶이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번 생엔 도저히 혼자 갈 수 없을 것만 갔던 운동장에서 전력질주하면서 축구를 하는 날도 내게 찾아왔다.
만주 벌판처럼 광활하게 느껴지던 학교가 언제 어디든지 몇 걸음이면 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동산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교문 밖은 여전히 위험한 불가능들 투성이어서 내 걸음은 뒤뚱거렸지만 교문 안으로만 들어오면 교실이든 기숙사이든 씩씩하게 다닐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낯설거나 불편하거나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다.
화장실 가는 것 같은 일상적인 일도 낯선 곳에만 가면 또다시 도전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길을 찾는 것도 나눠주는 종이들에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도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것도 내겐 순간순간이 해결되지 않을 불가능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렇지만 난 보이지 않는 채로 30년 가까이를 살았고 많은 것들은 학교의 화장실처럼 내게 편안한 익숙함으로 바뀌어왔다.
내가 뛰어놀 수 있는 곳은 이제 작은 학교보다는 수십 배 수백 배 넓어진 세상이 되었다.
아직은 입학하던 오래전 학교의 그것들처럼 찾아가기도 도전하기도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결국은 그때의 운동장처럼 내게 편안하게 뛰어놀 공간이 되리라고 확신하며 오늘도 나의 세상을 한 걸음식 늘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