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님과 바람'이라는 동화에서는 두 캐릭터가 지나가던 신사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바람은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강함만을 추구하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온화한 햇님은 따뜻한 볕으로 신사 스스로 옷을 벗게 한다는 결론을 맺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햇님이나 바람이나 그들이 가진 궁극적 목적은 스스로의 우월함을 뽐내기 위함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신사의 입장을 생각해서 답답한 슈트를 벗게 하고 싶었다면 깔끔한 샤워장과 편안한 침대를 제공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기분 좋게 옷을 벗는 것을 바랐다면 멋진 새 옷을 선물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그냥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었을 것이다.
며칠 전 다니던 직장에서의 퇴사를 고민하는 친구를 만났다.
고민의 시작은 실수를 지적하는 상사의 작은 꾸지람에서 시작되었던 듯했다.
의도치 않은 실수를 지적하던 상사의 훈계는 실수를 저지른 당사자가 느끼기엔 그 범위나 강도가 너무도 과했던 듯하다.
복무의 원리원칙을 처음부터 낱낱이 읽어주던 그의 설교는 평소 관찰해 두었다던 후배 직원의 인성평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끝이난 질책이 끝난 후 혼이 난 직원이 느낀 가장 큰 감정은 의욕의 감소였고 상사에 대한 반감이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시작된 꾸지람이었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심하게 상한 기분에 묻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듯했다.
실수는 반복되었고 그런 시간들 또한 짧은 시간에 수차례 되풀이되었다.
상처를 입은 그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의욕을 잃었고 결국 퇴사를 고민하는 데에 이른 것이다.
상사의 처음의 의도는 후배 직원이 저지른 실수의 교정이라는 의도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의 목적과는 관계없는 다른 것들이 섞이면서 혼내는 이의 의도와도 혼나는 이의 발전과도 관계없는 엉뚱하고도 비생산적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상사는 후배를 가르치기 위해 본인의 훌륭한 업무능력을 뽐내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하필이면 그날따라 나빴던 감정이 그 순간 화풀이하듯 터져 나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후배를 위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실수의 교정이라는 원래의 의도와는 정 반대를 향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었다.
그의 선배로서의 역할은 그냥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의 직업은 교사이다. 아직도 많은 순간 선배들이나 어른들에게 혼이 나기도 하지만 제자들을 꾸짖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나 스스로도 부족한 것이 많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교사 된 책임으로 잘못된 것을 수정해 줘야 할 때가 종종 생긴다.
그런데 혼을 내는 위치라는 것이 참으로 묘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작은 실수 하나 고쳐주는 것이 목적인데도 그 순간만큼 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무언가 엄한 분위기에 스스로 매몰되기도 한다.
나름 경력 있는 교사로서 확신하건대 그런 경직되고 권위적인 훈계는 훌륭한 효과로 이어지기가 힘들다.
바람과 햇님처럼 쓸데없는 힘만 허비하고 안 흘려도 될 땀만 흘리게 될 뿐이다.
난 다른 이를 칭찬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것이 실수를 덮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수는 따끔한 꾸지람보다 한 번 살포시 덮어주는 것이 그것을 고치는데 훨씬 효과적이다.
해님과 바람은 특별히 그 힘을 과시하지 않아도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 것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선배나 교사도 그렇다. 스스로 드러내고 강화게 화내는 것이 존경받는 길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누군가를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 또한 완벽히 틀렸다.
후배와 제자의 잘못을 조금은 더 멋진 방법으로 고쳐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은 어쩌면 그냥 덮어주고 기다리는 것일지 모른다.
다시 말하건대 신사의 옷을 벗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대나 새 옷을 선물하는 것 아니면 그냥 기다려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