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2023 Record

이것은 글이 아니라 기록

2023년 2월 11일 토요일, 맑음

by 감우

# 1

올해부터 매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두세 가지를 정한 뒤 트래커를 만들어 달성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달, 그러니까 1월은 새해가 시작된 직후라 조금 욕심을 부려 네 개의 목록을 정했다.


- 불렛저널 매일 활용하기

- 한자 공부하기

- 영어 공부하기

- 독서


위 리스트의 달성률이 100%가 아닌 것은 당연하지만, 100%를 달성한 것이 딱 하나는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것은 자그마치 '영어 공부'다. (해가 바뀌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스픽 연간 회원권을 결제하는 일이었다. 매우 만족하고 있다.)

불렛 저널에 기록하는 아주 심플한 핸드메이드 트래커


아무튼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1월을 보내며 느낀 점은 읽으려는 노력은 나름대로 잘해 나가고 있으나 쓰기에 대해서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목차까지 미리 정해두고 야심 차게 개설한 매거진 [잃어버린 나를 찾습니다]는 언젠가 소리소문도 없이 중단된 뒤 지금껏 재개되지 않고 있다. 인풋만 늘고 아웃풋이 없으니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2월 트래커에는 '쓰기' 목록을 추가했는데, '2월에는 매일 쓰자!' 다짐하고 만든 트래커를 기록하며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언제나 쓰기를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미룬다. 2월이 열하루나 지날 동안 나는 딱 두 번 썼다. 썼다고 해 봤자 인스타에 올릴 책 서평 몇 줄을 쓴 게 전부지만.


그러다 며칠 전 문득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을 얻었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내가 소설가를 꿈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소설가는 내 주제에는 될 수도 없거니와 내가 진짜 원하는 일도 아니었다. 나는 차라리 마케팅이나 브랜딩 쪽에 언제나 흥미를 보였고, 왠지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다.(내 인스타 팔로워 상승폭을 보면 이 또한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애니웨이)


그런데도 내가 아직 끝내지도 못한 매거진을 제쳐두고, 새로운 매거진을 개설하는 열정까지 발휘하여 이 잡설을 쓰고 있는 이유는, 떠나간 소설가의 꿈은 차치하고라도 기록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요즘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머릿속에 온갖 잡생각을 그득그득 채워 넣으며 산다. 생각이 쉬는 순간은 잘 때 그리고 미디어의 노예가 될 때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보통, 스치듯 떠오른 문장이 꽤 멋지다고 느껴진다거나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가 매우 기발하다고 생각할 때, 오늘 읽은 책 속의 문장이 너무 좋아서 혼자만 알기엔 아까울 때 글이 쓰고 싶어 진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하루 중 가장 반짝였던 편린을 고른 다음, 그것을 잘 요리해 한 편의 글로 만들기까지의 여정이 아득하고 막막해서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그 편린 자체를 기록하기로 했다. 매일 쓸 수는 없어도, 매일 기록할 수는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 2

퇴사를 하고 1년을 백수로 살다 서점원이 된 지 6개월째다. 무직과 무급여의 공포를 견디며 자그마치 1년 동안 앞으로 무엇을 해 먹고살까 고민하다 서점 주인이 되어야겠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는데,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찾아 읽고 어쩌다 서점원이 되어 날것의 현장을 들여다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조지 오웰의 그것과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내가 <The 도서 판매러>가 되고 싶을까? 전반적으로 -(...) 내가 서점에서 행복하게 보낸 나날도 좀 있긴 하지만 역시- 아니올시다 _조지오웰의 <서점의 추억> 중


그래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책 팔아서 먹고살고 싶은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생업의 형태가 단순한 책 소매업으로서의 서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다. 뭔가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 도쿄 독립 서점 Title의 주인 쓰지야마 요시오 씨가 쓴 <작은 목소리, 빛나는 책장>을 다 읽었다. 사실 이 책은 딱히 서점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쓰지야마 요시오라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생각했던 종류의 책은 아니지만 아무튼 잘 읽히는 책이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딱히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빌려 읽었는데, 사지 않고 빌려 읽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늘 읽으며 밑줄 친 문장들

# 3

사실 오늘의 메인이벤트는 바로 BONDEE(본디)의 유저가 되었다는 것. 이 기묘한 신문물은 무엇인가 싶어 스리슬쩍 입문해 보았는데, 조금 빠진 것 같다. 제페토는 전혀 흥미를 못 느꼈었는데, 이건 말하자면 카톡 같은 메신저에 메타버스 기능을 살짝 더해 놓은 느낌이라 훨씬 유용하면서도 만족감이 높았다.

개인적으로 메타버스니 뭐니 다른 것들을 다 떠나서 친구를 50명만 추가할 수 있게 제한을 둔 것이 본디의 '킥'이라는 생각이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카톡보다는 페메나 디엠으로 소통한다. 이들은 현실 공간뿐 아니라 가상 세계에서조차 어른들로부터 고립된 고유의 공간을 추구한다. 이것은 사실 어려서의 문제라기보다 관계성의 문제이다. '이건 우리끼리 얘기지만'을 서두로 꺼낼 수 있는 정도의 사이, 어느 정도 서로를 믿고 내밀한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사이라면 공개된 곳보다는 은밀한 장소에서 할 이야기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고 전시되는 사이버 공간에서 나를 필요 이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편이지만, 정말 친한 친구들 몇 명하고만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만 공유되는 공간이라면 별로 거리낄 것이 없어진다. 본디는 친구 수 50명이라는 제한을 둠으로써, 거절의 명분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가 되기를 거부할 권리를 부여한다. 오늘 전 직장 동료가 눈치도 없이 친구 요청을 했지만 나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시해 버렸다.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 아파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본디를 이용하는 의미도 없거니와, 나중에 우연히 그를 만나더라도 친구 50인의 자리는 이미 다 들어차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아무튼 오늘 본디에서 한참을 놀다가 이렇게 말하고 헤어졌다.

"이제 카톡으로 말 걸지 마, 앞으로 힙하게 본디에서 만나자." (이게 어린 친구들이 카톡을 이탈하는 이유였을까?!)


# 4

오늘 헐레벌떡 출근을 하는데 유튜브 꿈나무가 내 발길을 잡았다. 영화 유튜브를 하려고 하는데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도 이미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이 예상되는 상황이라 일단은 거절했는데 다시 한번 부탁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홍대 바닥에서는 이런 일들이 왕왕 있는 편인데, '도를 아십니까'로 내 뒤통수만 치지 않는다면 최대한 도와주려는 마음이다. 거리에 나와 자신의 계획을 말하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묻는 일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것은 어떤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없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유튜브를 거의 안 보는 편이라 딱히 도움을 주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성실하게 답해주고 3분가량 지각을 했다. 아무튼 이름 모를 그 청년을 응원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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