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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Mar 16. 2023

결혼기념일 꽃다발은 이제 그만

*** 매거진 <꽃과 명품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는 취향의 차이에 대한 생각을 담기 위함이지, 자랑하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에겐 자랑으로 보일 수 있겠다는 우려도 듭니다. 자랑처럼 느껴지셨다면 저의 내공이 부족한 것이니 양해해 주시고, 꼴 보기 싫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 주세요. ***




남편과 첫 번째로 맞이한 결혼기념일이 떠오른다. 퇴근길에 버스에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는데 저 멀리 꽃집으로 남편과 닮은 사람이 들어갔다. 남편이 맞나 싶어 걸음을 재촉하여 꽃집 앞까지 갔다. 들여다보니 남편이 맞았다. 나는 꽃집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꽃다발을 들고 꽃집 밖으로 나오는 남편에게 나는 짓궂게 말했다.

“나 봐버렸네!”


남편은 깜짝 놀라며 “야, 이런 건 봤어도 못 본 척 좀 해라.”라고 말했다. 그때 받은 꽃다발이 얼마만 했는지, 어떤 꽃이었는지, 무슨 색이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상황이 깔깔거릴 만큼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난다.


남편은 매년 결혼기념일에 꽃을 선물했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 나에게 꽃 사는 장면을 들켰던 게 억울했는지 남편의 기술은 점점 늘었다. 어떤 해에는 마트에 장 보러 간다고 말하고 사 오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늘 퇴근하던 시간에 퇴근하면서 꽃다발을 슬쩍 들고 오기도 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작년 그 꽃집’에다 꽃다발을 예약해둔 게 ‘칼퇴근 꽃다발’의 비결이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떤 해에는 퇴근 후에 함께 저녁을 사 먹고 집으로 왔는데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 트렁크에서 꽃다발을 꺼내 주는 깜짝 이벤트를 한 경우도 있었다. 정말로 예상치 못했던 터라 “이걸 언제 샀어?”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내가 말이야, 자기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민하고 시간 계산을 해서 샀냐면…”이라며 신이 나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꽃을 받아서 행복한 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나는 꽃을 싫어했다. 나도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고 꽃을 몇 번 받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가 “뭐 이런 걸 사 왔어?”라고 말했을 때는 나조차도 이게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지, 진짜 꽃을 안 좋아해서 하는 말인지 구분이 안 갔었다. 매번 꽃을 받을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가격을 물어봤다. 남편은 뭐 그런 걸 묻고 그러냐며 안 알려주려 했지만, 내가 시세를 알고 싶다며 집요하게 물으면 결국은 대강의 가격을 알려줬다. 꽃다발 가격을 들으면 솔직히 돈이 아까웠다. 몇만 원이나 되는 돈을 하루의 기쁨을 위해 쓴단 말인가! 졸업식이나 연주회도 아닌, 결혼기념일에?



나는 꽃다발을 받으면 그대로 아무 데나 올려놨다. 꽃병에 꽂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고, 꽃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없었다. 그냥 퇴근하면 모든 게 귀찮았던 시기였다. 또 한편으론 ‘어차피 죽을 꽃, 꽃병에 꽂아 며칠 더 연명한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연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에 살아 숨 쉬는 꽃과 나무는 예쁘다. 자연에 있는 모습으로 즐기면 되는데 왜 굳이 꺾어서 집에 들여놓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학창 시절 어쭙잖게 빠져 있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인위(人爲)를 부정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노장사상이 나는 좋았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니, 가장 우월한 존재니 하는 말이 영 거슬렸다.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일 뿐인데 인간이 동식물을 마음대로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인식하는 차이는 과거 동서양의 정원 개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서양의 정원은 내 집 앞 땅에 예쁜 걸 갖고 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는 다르게 풍경 좋은 곳에 집을 지어놓고 이 앞 자연이 다 내 정원이라 생각하는 것이 동양의 정원 개념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거라 진위 및 출처는 모르겠다만 굉장히 타당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동양의 정원이 하나도 멋지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연을 덜 해치는 선에서 자연을 즐기는 동양의 정원이 진정한 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꽃다발을 안 좋아하는 데 뭐 이리 구구절절 거창한 이유를 대나 싶겠지만, 남편이 결혼기념일에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남편이 매년 결혼기념일에 꽃을 사 온다고 주변인들에게 토로하면 자랑하는 거냐, 행복한 소리 한다 등의 반응이 돌아왔다. 심지어 꽃은 처리하기 힘든 쓰레기라며 싫어하던 친정 엄마마저 “고맙게 받아. 괜히 뭐라고 했다간 대접도 못 받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아마도 엄마는 당신의 생신에 사위에게 꽃바구니를 한번 받고 나서 절대적인 사위의 편이 된 것 같다.) 결국 나의 남편은 완벽한 남편이고, 나는 복에 겨워 헛소리하는 삐딱한 아내였다.


나는 결혼기념일마다 남편에게 꽃을 사 오지 말라고 투덜대면서도 꽃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그래, 몇 만 원을 썼으니 그 정도는 자랑해야 한다. 그 꽃다발은 그것으로 생명을 다했다. 그 후론 거실 바닥 혹은 티브이장에서 말라비틀어질 운명이니까.  



결혼 10주년에 남편은 꽃바구니를 선물했다. 꽃다발도 아닌 꽃바구니라니!

“어이구, 이를 어째. 꽃도 버리기 힘든데 이렇게 큰 바구니까지!”

나는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온 한탄을 감출 수 없었다. 남편의 정성스러운 선물에 환한 미소로 화답하는 좋은 아내가 되지 못했다. 서둘러 마음을 가다듬고 남편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그런데 꽃은 이제 정말 그만 사 와. 10년이면 많이 받았다 아이가!"

남편은 나에게 정말로 꽃을 원하지 않는지 물었다.

"나 진짜 내년부턴 꽃 안 산다?"

"응, 부탁이야. 이제 진짜 사지 마."

어이구 저 바구니를 어째. 그래도 SNS 자랑은 했다.


그렇게 결혼기념일 꽃 선물은 중단되었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단순한 취향의 차이일 뿐이거늘, 내 취향을 인정받기가 이렇게도 힘들다니. 10년이나 걸렸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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