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물 한 번 흘리지 않고 잘 견뎌내었다.
몇 달간은 좀처럼 웃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의 일상을 해치지 않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야. 이성으로 감정을 잘 컨트롤할 수 있어.'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면 문득 그가 꿈에 나왔다.
내 이성도 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나면 하루 종일 가슴이 먹먹했다.
꿈은 내가 꾸고 싶어서 꾸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그의 꿈을 꾸고 나면 나는 자책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 놈 꿈을 꿀 거야?'
몇 년이 흐르고 싸이월드에서 그를 찾았다.
그와 다시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궁금했다. 잘 살고 있는지, 그 때 대체 왜 그랬는지.
그에게 말은 걸었더니 그에게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일촌 신청이 왔다.
나는 마음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왜 네 친구야? 우리가 무슨 친구냐고? 기본적 신뢰가 없는 친구 사이가 있냐?'
그렇지만 나는 두말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싸이월드에서 일촌을 신청하려면 두 사람의 일촌명을 입력해야만 했다.
과연 친구가 아니라면 어떤 호칭으로 일촌을 맺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친구도 아니면서 친구라는 이름의 이상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친구'라는 일촌명 덕분인지 나는 내 상처를 봉인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그는 괜찮은 친구였다. 위트 있고 말도 잘 통했다. 나쁘지 않은 '온라인 친구'였다.
하지만 가끔씩 내 마음 속에서는 분노가 울컥 치밀곤 했다.
그가 전 여자친구 얘길 하면 '넌 나한텐 그렇게 연락 두절해놓고 잘도 연애를 했구나.'라고 생각하고
약속이 있다고 어디 지방을 갔다온다고 하면 누굴 만나는지도 모르면서 '그래, 너는 사랑을 시작할 땐 적극적인 사람이었지.'라고 생각했다.
세상 쿨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비비 꼬인 마음을 가졌던 나는 그에게 내색하지 않고 잘도 숨겼다.
그렇게 그와 몇 년을 온라인 친구로 지내던 어느 날, 나는 오래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기로 하여 그에게 소식을 전했다.
"나 결혼해."
너와 나,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나의 이 발표가 너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길.
"음....."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말했다.
"나한테 궁금했던 거 있으면 물어봐."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뭘?"
"물어보고 싶었던 거 없어?"
갑자기 뭘 물어보라는 거지? 그러나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너 그 때 왜 그랬어?"
어쩌면 이 한 마디를 묻기 위해 그동안 이상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 같다.
이 질문을 묻겠다고 몇 년간 연락하지 않던 사람을 찾아냈는데, 막상 연락을 하게 되니 도저히 솔직하게 물을 수 없었다. 왜 그랬냐고 묻는 순간 어떤 균형이 깨질 것만 같았다.
만약 그의 대답이 "네가 갑자기 너무 못 생겨 보이더라."랄지, 혹은 "네가 그냥 싫었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던 내 자존감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차마 묻지 못 한 채 몇 년이 흐른 것이다.
"그 날 부모님이 갑자기 이혼하신다고 했어. 아빠 사업이 부도나고 부모님이 이혼하신다는데, 너는 화목한 가정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거 같았어."
그래,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구나.
원인이 나는 아니었구나.
사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도 그 당시 집안에 우환이 있었건만.
어쩐지, 연락을 다시 시작했을 때 그는 매일 돈을 버느라 바빴고 늘 돈에 쪼들렸다.
월세 낼 돈이 모자라서 친구 집에 빌붙어 살았고 자신과 동생 학비까지 벌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갑자기 찾아온 시련에 곁에 있는 사람과 어려움을 공유하는 대신 혼자만의 동굴로 들어가 버리는 쪽으로 서투른 결정을 한 것이었다.
이유를 듣고 나서 나는 비로소 첫사랑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10년 가까이 꾸던 그의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그건 연애가 아니었어. (진짜 끝)
어느새 계절은 이렇게
내 여름날과 함께 저물고
시원한 바람 그 속엔 내일 또 내일
너도 가끔 기억을 할까
눈부시게 반짝거리던
푸르른 지난 여름날 우리들
- 유희열, 여름날 (feat. 페퍼톤스 신재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