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생일파티는 차원이 다릅니다.
필리핀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아이를 등원시키러 갔더니
유치원 한쪽 'Happy Birthday'라고 화려하게 풍선 가득 꾸며져 있습니다.
잠시 후 마술사가 나타나 마술쇼를 합니다.(미녀는 안 나옵니다)
비둘기에, 토끼에, 빨간, 노란 손수건은 물론 꽃가루가 날립니다. 저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너무 어설프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좋아라 합니다.
어쨌든 마술사를 본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본 마술이라곤 제 돈을 노리는 야바위꾼 아저씨의 마술뿐이었는데...
마술사가 들어가고 인형탈 쓴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무리 봐도 마술사 아저씨와 동일인입니다. 어른의 눈물겨운 투잡입니다.
모른 척해야 합니다.
케이크는 물론, 간단한 다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파티가 끝나니 아이들 답례품도 줍니다.
처음 경험한 저는 이게 다 뭔가 싶습니다.
부담이 확 옵니다. 저희 둘째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친구 생일에 초대받았을 때 어떤 선물을 해야 할 지도 걱정 됩니다.
마술사를 보고 놀란 저는 어버버 하면서 한국에서 먼저 오신 선배님들께 여쭙습니다.
저희 둘째가 곧 생일인데... 마술사... 불러야 하나요?
다행히 아니라 합니다.
생일파티는 천차만별이라고 합니다.
아이가 원치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고, 그냥 반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방법,
키즈카페나 플레이존을 빌리는 방법, 집에 초대하는 방법 등 옵션이 많습니다.
다행히 둘째는 부끄러움이 많아 생일파티 없이 그냥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만 돌리고 싶다고 합니다.
돈이 굳었습니다. 효녀입니다.
생일파티는 필리핀에 있는 한국 부모들 사이에 빈번하게 나오는 주제입니다.
이번에 아이 생일에 1백만 원 썼다, 우리는 아이가 친구들 불러서 어디서 생일 하고 싶대서 2백만 원 썼다. 우리는 애한테 생일선물 5개 사주는 걸로 합의 봐서 생일파티는 안 하기로 했다 합니다.
경제적인 부담은 기본, 마음의 부담은 더 큽니다.
생일파티에 함께 온 부모들과 영어로 스몰토크도 해야 하고, 음식도 챙겨야 합니다.
(이곳 특성상 가디언을 대동해야 함)
아이 생일을 앞둔 부모님들은 한결같이 표정이 어둡습니다.
가끔 들려오는 전설 같은 얘기가 가뜩이나 무거운 마음에 커다란 부담을 얹습니다.
어느 아이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갔는데, 답례품으로 아이폰을 주더라.
너무 부담돼서 다시 돌려줬더니 부모 왈, 색깔이 맘에 안 드니? 했다더라.
어느 유명한 패밀리 집에 갔는데 재규어(생물. 자동차 아님)가 있더라 같은 얘기들입니다.
반면 한국은 언젠가부터 성대한 생일파티를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 되었습니다.
제 어릴 적과 달리, 생일이라고 스페셜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없습니다.
그냥 언제든 케이크 땡기면 사 먹고, 바나나 땡기면 사 먹을 수 있습니다.
위화감 조성, 맞벌이, 놀이문화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생일파티는 없어지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대신 어린이집에서 생일이 같은 달인 친구들을 모아 생일파티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곤 합니다.
물론 따님들 생일선물은 별도로 드려야 합니다.
영어 학원 선생님께 필리핀의 생일파티 문화를 묻습니다.
필리핀은 생일파티를 신나게 하는 문화가 있다. 다만, 파티 규모는 부모의 재력과 관련 있다.
돈 없는 친구는 그 나름의 예산 안에서, 부자들은 성대하게 자랑하며 한다.
모두 형편 껏 생일파티를 즐긴다. 다만, 서로 비교하지도 않고, 크게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생일에 다스베이더가 나타나는 건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둘째 친구 생일에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가 등장함)
필리핀에서는 7살 생일이 특별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7살은 아기에서 어린이로 올라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어린이식 같은 개념입니다.
우리가 스무 살 성인식(이제 술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축하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어린이 때 한번 더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납득이 안 갑니다. 7살이 된다고 대단히 성숙한다던가 하는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꼬마일 뿐입니다.
수상합니다. 7살 특별 생일파티는 그냥 파티 좋아하는 필리핀 사람들이 조금 더 특별함을 느끼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어릴 적을 떠올려 봅니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평소 먹지 못했던 케이크며, 흔치 않은 바나나, 딸기 등을 함께 먹습니다.
친구 생일에는 샤프 같은 것을 문방구에서 구입해 직접 포장해서 선물로 가져갑니다.
어쩐지 특별한 날의 느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마흔이 넘은 지금은 더 나이 먹기 싫어 생일 챙기기도 싫습니다.
어릴 적 '아빠 생신축하드려요.' 하면 '오늘 내 생일이냐?' 하시던 것도 떠오릅니다.
안 되겠습니다.
이왕 나이 먹는 거 잊는다고 잊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음번 제 생일을 특별히 챙겨야겠습니다. (결론이 이상한데? 왜 이상한 쪽으로 급발진?)
저도 키즈카페 대여해서 친구들 잔뜩 부르고 마술사도 불러야겠습니다.
아마 못하겠지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칭찬은 좀 해줘야겠습니다.
'나 태어났고, 여태 잘 자랐다. 딸도 두 명이나 낳았다. 와이프님도... 잘 모시고 산다. 잘하고 있다.'
아이들이 고물고물 써준 카드를 받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