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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기 Jul 10. 2021

7월 10일 :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D-2

더 이상 우울하고 외롭고 싶지 않은데


상심해서 쓰는 글이다.


상심의 원인은 사실 별 거 아니다. 한 3주 전쯤인가, 에어컨 안쪽 먼지 닦기를 시도하며 혼자 용감하게 에어컨을 분해했다가 재조립한 후 나사가 하나 남았었는데, 다시 뜯어서 조립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뤘었다. 그동안은 낮에는 더웠어도 주로 회사에 있었으니 에어컨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회적 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되고 폭염이 찾아온다고 하니 부랴부랴 다시 조립하는 도중에 에어컨 날개 고리 부분이 똑, 하고 부러져 버렸다. 월세살이인데... 젠장, 그대로 땀범벅인 이마를 대충 닦고 접착제와 콘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와선 후들거리며 접착제로 부러진 부분을 고정시켰다. 땜질 방식으로 해결은 됐지만 뒷 맛이 씁쓸하다. 월세 계약 만료는 다가오고 전세를 구하는 와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서인가, 집주인이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뭐, 아무도 알 수 없겠지. 다들 이 넓은 서울에서 살 집이 없다고 난리인데. 혀 끝에 느껴지는 까만 흑임자가 점점이 박힌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으로 씁쓸한 순간을 달랬다. 그래, 이 정도는 잠깐 지나갈 상심이다.


  문제는 언제나  여기저기에 있고, 때로는 내가 사고를 치지 않아도 문제가 바깥에서 쳐들어 온다. 바로 어제,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격상에 나는 하루 종일 불안과 무기력함에 시달렸다. 이번 불안과 무기력함의 근원은 조금  에어컨 사건보다는  깊다. 나는  가지 트라우마로 인해 1 동안신경안정제와 세로토닌 흡수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고, 지난달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 끝에 드디어 2~3일에  번씩 복용하는 방법으로 줄이는 것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다시 약을 모두 꼬박꼬박 복용하는 기간을 거친 후 단약을 재시도해보려던 참에 회사에서 커다란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자정까지 야근을 하며 지구 반대편과 실시간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이 연속되었고, 약을 줄이는 것은 당분간 포기했다. 프로젝트가 얼추 끝나고 나니 월세 계약 만료 기간이   밖에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월세를 살면서 돈을 모으는 것은  월급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워서, 대출을 받아서라도 이번엔  전세로 옮기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런   넘어 산이라고 해야 하나,  일주일  열심히 발품 팔며 집을 5 정도 보러 다니던 와중에 4단계로 격상되었다. 이래서 전세를 구할 수나 있으려나. 거기다, 회사 근무 방침은 완전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다행이지만  편으론 불행한 일이다. 타고나길 외향적인 성격이라 월화수목금 9시부터 6시까지 홀로 집에 틀어박혀 근무를 하는 것은 어쩌면  증세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작년 코로나 초기 재택근무  이미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작년에는  구성원이 바뀌어서 적응을 해야 하는  여러 변수도 있어  어려웠고, 이번엔 약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길을 다시 걷는 것은 역시 두려운 일이다.


혹시나, 이 힘든 상황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아마 겪었던 여름 중 가장 지루하고 힘든 여름이 될 테다. 아니다. 첫 회사에서 퇴사하고 모든 걸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가 하루는 히키코모리처럼 박혀있다가, 또 하루는 땡볕을 미친 듯이 걸어 다녔던 몇 년 전 여름은 이길 수 없으려나? 눈물인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도로의 아지랑이 때문인지 뿌옇게 번져 가던 풍경 속 잘 익은 진녹색 나뭇잎으로 기억되는 그 해 여름의 우울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속절없이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결심하면서 나도 나름대로 대비는 하고 있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암막커튼을 걷어 젖히고 월세 50만 원의 (거의 유일한) 장점인 햇빛을 쬐기로 했다. 요 며칠간 집을 보러 다니면서 정말 하루에 단 한순간도 햇빛을 쬘 수 없는 집이 서울에는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실감했다. 집을 보러 가서 문을 열면 어김없이 앞집 창문, 가로등, 간판 등등 낮에도 밤에도 빛이 없거나 밤에 필요도 없는 빛공해를 선사하는 것들이 하나씩은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그나마 고층에 앞 건물들이 죄다 저층 건물이라 하루 종일 햇빛이 눈부시게 부서지다가 찬란하게 곡선을 그리고는 은은한 노을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난 재택 기간에 외로운 나를 달래주는 것이 이 햇빛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창문을 열어놓고, 바깥이 궁금해 창틀에 앉아있는 고양이처럼 일을 할 작정이다.


책도 한 권 샀다. 아마 한 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탐욕스럽게, 게걸스럽게 읽어대며 반쯤은 가둬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를 잊게 될 것이다. 일부러 철학 책으로 골랐다. 생각을 오래 할 수 있게, 그래서 잊을 수 있게. 요즘 택배는 참 빠르다. 토요일인 오늘 아침에 주문했는데 오늘 온다고 한다. 어디 나가기도 겁나는 이 상황에 내 입장에서는 좋지만,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이동 노동자의 권리가 귀에 쟁쟁하며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코로나 시대의 또 다른 부작용이다.


꽃 한 다발은 주문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바로 근처에서 언제든 꽃을 볼 수 있어서다. 빌라가 가득한 이 동네에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여기서 오래 살면서 빌라를 재건축해서 임대를 놓고 있는 듯한 나이 지긋한 집주인들이 꽃을 경쟁적으로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듯반듯한 빌라 골목마다 해바라기, 접시꽃, 금낭화, 분꽃 같이 시골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이 자라고 있다. 어느 화단에는 점잖은 붓글씨로 ‘꽃을 꺾어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마세요.’ 경고가 붙어 있는데, 자극적인 문구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괜히 귀엽기도 하고, 꽃을 정말 사랑하는 주인 분의 마음이 느껴져 괜스레 그 화단은 오늘은 꽃이 더 피었나.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꽃을 심는 걸까, 아직 개발되기 전 동네의 향수를 추억하는 걸까, 아니면 도시 속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가질 수 없는 습관 같은 걸까? 요즘 플랜테리어가 유행하기는 하지만 이 빌라촌의 정겨운 화단과는 어딘가 결이 다르다. 여하튼 그래서, 꽃은 운동 겸 산책 겸,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보고 기분 전환을 하기로 했다.


그 밖에도 운동, 음식 채워 넣기, 청소 등등.. 집에서만 보내게 될 시간을 대비하고, 마지막으로 브런치에 날마다 글을 쓰기로 했다. 바닥에 철푸덕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급하게 결정하긴 했지만, 글을 쓰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으니까. 나는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한번 바이러스와의 지루한 싸움이 예고된 서울의 여름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작은 상심으로 시작한 이 여름의 끝은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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