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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영신 Apr 14. 2021

먼 곳의 시간

여행, 한 걸음은 나에게로, 한 걸음은 다른 길로


삶을 위한 멈춤이 필요했다.

멈추지 못하는 삶은 다만 바깥의 일만이 아니었다.

어쩌다 집에 있게 되는 날도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마냥 분주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정리하고 만지고 부리며 바툰 날들을 이어갔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그렇듯 질주하는 삶의 속도값이 '0'으로 떨어지며 길 위에 멈추어 서는 일은 상상조차 어려운 이었다.

모든 출장과 여행, 회의와 강연들이 취소 되고 가만히 멈추어 선 낯선 시간. 몸이 존재하는 곳은 한국과 일상이건만 마음의 풍경은 먼 곳에 다다른 듯 아득한 시간의 모퉁이였다.

여러 해 전 티벳 라싸에서 시가체로 가던 고원의 길, 황막한 길 위에서 차가 고장나 간신히 찾아든 마을이 있었다. 춥고 배고픈 채로 고장난 차 위에서 불안과 긴장의 시간을 보낸 우리에겐 따뜻한 밥 한 끼가 절실했다.

그러나 도로 변을 따라 십여 채의 집이 늘어서 있을 뿐인 작은 마을에 식당 같은 것이 있을리 만무했다. 유일한 상점인 구멍가게에 들어가 통하지 않는 말로, 온간 몸짓으로  도움을 구했다.

간절함은 늘 통하기 마련인지라 주인장은 팔던 야채 바구니 속에서 감자 몇 알을 꺼내어 무심히 어제도 먹었고 내일도 먹을 듯한 티벳식 야채볶음을 한 그릇을 따끈하게 만들어 건넸다. 허겁지겁 식시를 하는 우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한참을 보다가 난로위에서 끓고 있던 티벳식 밀크티를 토기에 따라 주셨다. 따뜻하고 달콤한 짜이 한 잔을 마시며 평화의 맛이란 이런 것인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차는 언제 고쳐질지 요원했고, 지금이 몇 시인지, 다음 일정이 무엇인지 아득히 잊혀졌던 시간. 그 텅빈 여백의 시간과 고원의 바람, 찬 공기 속에 마시던 유목민의 짜이 한잔이 주던 달콤함과 안온함들이 황막함을 견디게 했다. 상해에서 정주를 거쳐 우르무치와 둔황을 지나 꺼얼무를 지나는 먼 길, 라싸를 넘어 시가체에서 장무로, 히말라야로 이어지던 5천킬의 여정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그 고원의 멈추어선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따뜻한 기억의 위로였다.


여행은 늘 '멈춤'이 얼마나 삶의 위로인지를 가르쳐주곤 한다.

코로나는 여행에서 도착한 낯선 곳 마냥 다다를 수 없던 '먼 곳의 시간'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멈출 수도 머물 수도 없던 분주하고 분절된 삶 속에서, 

어떤 움직임도 머무름으로 수렴되는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 멈춤의 시간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여기,

도착해 있는 것인지...


"찾아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끝내 발을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나희덕 '땅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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