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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영신 Apr 02. 2021

봄은 가장 먼 곳부터

공정여행가 엄마와 비건 딸이 함께 하는 삶의 여행 1

 

봄은 가장 먼 곳부터 겨울산을 뒤덮으며 꽃의 속도로 온다. 겨우내 차고 시린 바람과 눈비를  견뎌 낸 봄꽃의 소식은 고난을 이긴 나무들의 부활인듯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르는 기쁨을 전하곤 한다.  


하동부터 구례 섬진강까지 봄꽃은 속속 북상하고 있건만 여행의 동선은 쉬이 정해지지 못했다. 진정한 여행은 아무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지만, 머무는 여행의 첫걸음은 아무래도  '머물 이유'가 필요했다. 지난해 담양에 향토사 전문서점을 시작한 전고필 선생님의 "책방 이목구심서"가 궁금하던 차였고, 소쇄원에 피어났을 온갖 봄꽃들과 대숲에 물든 봄을 마중하고 싶은 마음이 보태어지며 여행의 경로가 담양으로 결정되었다. 담양의 장날과 읍내, 천변의 낮은 마을들 속에 숨은 속살 같은 골목길을 걸어보고 싶었고, 마침 시작되었다는 담빛 예술창고의 전시도 마음이 기울었다.


때마침 겨울에 받아 소중히 여며 두었던 책방 이목구심서의 초대는 여행의 기댈 언덕이 되어 었다. 담양에 초대하는 전고필 선생님의 유일한 조건은 시간이었다. 강연만 하고 총총히 떠나는 바툰 걸음이 이 아니라 담양에 머물며 사람과 마을, 숲과 골목을 걸을 수 있는 수 넉넉한 시간을 준비해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겨울에 받았 두었던 그 초대가 목련마냥 봄을 여는 꽃잎들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떤 훌륭한 여행도 진심으로 마중해 주는 벗이 있는 여행을 넘어설 길은 없다. 여행의 원형이 누군가의 환대에 기대어 있는 까닭이다. 하물며 그 사람이 그 지역에 삶의 뿌리를 두고, 삶을 심어 문화와 예술을 꽃피워 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책방 이목구심서는 담양 국수 골목이 이어지는 천변을 지나 낮은 지붕들이 어깨를 잇대어 늘어선 골목길, 오래된 할머니 댁 마당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도를 켜고 부러 찾아오지 않았다면 여행자의 걸음으로는 도저히 찾을 길 없는 곳이었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던 기억마냥 시간이 아득히 쌓인 마당을 가로질러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제서야 숨겨둔 듯 책방이 나타났다. 아무 지원도 없이 호주머니를 털어 시작하신 책방에 이어 책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루를 꼬박 보내는 말술학교에 온 도처의 사람들로 책방은 오랜만에 북적였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이 작고 외진 책방에 오려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기대어 사람을 만나고 하룻밤을 머물고 가려 작심하고 내려온 사람들은 알아서 머물곳을 정하고, 저마다의 키워드를 따라 담양을 여행하다 저물녁의 책방에 속속 모여들었고 있었다. 남도 테마 10선의 PM이자 전 대인시장 예술감독이었던 책방 주인장의 삶은 문인부터 공무원, 지역의 예술가에서 정책 전문가까지 경계를 넘는 만남을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열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불과 일 년 남짓한 책방에는 어느새 이곳저곳에서 보내온 이 땅 곳곳의 기록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발간한 마을과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누군가의 마을과 삶, 역사의 실뿌리들을 탁본하듯 담아둔 소중한 기록들이 지명이 붙어있는 서가에  제 위치를 잡고 오롯이 꽂혀 있다. 오래된 책들의 그윽한 서향과 갈피갈피 시간이 고여있는 책들을 뒤적이다 보면 생각보다 오래 머물고야 마는 시간의 상점이었다. 누군가가 모으지 않으면 사멸될 기록들을 보관하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의 창고였다. 이 책방에서 책이 잘 팔리기는 하는지 오는 이마다 궁금해 마지 않았을 그 질문을 다시 여쭈었다.

"팔고 싶지 않은 책을 모아 책방을 하 니, 잘 리가 만무하죠. 책방이란 이름으로 이야기를 모으는 일에 더 마음을 두어요."

어쩔 수 없이 팔거나 누가 가져간 책은 다시 사서 채워넣기 일쑤라는 책방 주인의 속사정을 설핏 듣기도 하였다. 이쯤되면 책방이 아니라 향토사전문 도서관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민간이 아니라 관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 다시 여쭈니 역시 무심하게 답해주신다.


 "맞아요. 해 보니 더더욱 향토사 전문 도서관이 만들어져야 할 이유는 더욱 절실해요. 저 수많은 삶과 땅의 이야기들이 모두 스러져가고 있잖아요. 하지만 관은 늘 느리고 더디니, 먼저 생각한 사람이 할 뿐이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중요하다 여기는 사람이 하는 게 맞는 법이죠"


"문장이란 골수에 스며들어야 좋다"는 조선 최대의 문장가, 이덕무의 말을 그는 한 치도 비켜서지 못한 채 책방을 열고 삶을 매어두는 데까지 이른듯 했다. 지역의 역사와 서사,  삶의 서정과 풍경까지 담아내는 책방 이목구심서는 서점을 통해  골목과 시장, 강과 대숲의 도시 '담양'이라는 책을 읽는 여행으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책방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다 보면 뜻밖에 영화 세트장 같은 아름다운 거리가 이어졌다. 담양군에서 도시재생사업을 하며 낡고 후패해져 가는 집들을 매입해 청년과 예술가들을 위해 만들고 있다는 쓰담길이었다. 벽돌과 목조로 지어진 낮은 집들이 이웃집들을 헤치지 않으면서 새로움을 머금기 시작하고 있어 그곳에 새롭게 생겨난다는 카페며 게스트하우스가 궁금해져 어느새 다시 내려올 수 있는 날들을 마음속으로 헤아려보기 시작한다.  해가 져물고 밤이 켜지며 등을 밝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길은 시장을 지나 물결처럼 강으로 이어진다.


낮을 채우던 온갖 소리가 스러지고 관광객들이 떠나고 난 후 사위에 어둠이 내리고 고요에 다다른 저녁... 어둠에 스며들기 위해  숨을 고르듯 고요한 강은 부산했던 하루의 모든 움직임들을 멈추어 세운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걷듯 집에 있는 동안도 움직지기를  멈추지  못했던 걸음들이 그제야 멈춤에 다다른다. 저물녘에 도착한 삶은 대숲의 바람소리와 아늑한 어둠 속에 깊은숨과 쉼을 허락해 주었다.

이목구심서, 말 그대로  듣고, 보고, 먹고, 마시며 마음을 기울여 삶의 속도로 그 장소와 사람을 삶으로 알아가는 여행을 향토사 전문서점이란 저 낯선 책방을 연 예술가의 삶이 안내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루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깃든 숙소는 죽녹원 뒷편의 한옥 숙소 조아당이었다. 나무로 지은 집의 향내가 가득한 한옥집에 도착해 온돌 방에 짐을 풀고나니 시원은 아이패드와 책들을 챙겨 낮에 미처 다 듣지 못한 녹화강의를 듣기 시작한다. 피디에프로 챙겨온 책들을 읽고 써야 할 쪽글들을 쓰다가 지치면 창을 열어 별을 본다.

들어야 할 수업의 양이 줄어든 것도, 해야 할 과제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틈틈히 마주할 수 있는 숲과 하늘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는 것이 오랜 잠영 후에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긴 숨을 내쉬는 것 마냥 삶의 깊이와 무게를 견디는 호흡이 되어 주었다.   


아침에 눈을 떠 마당에 나서보니 숙소는 마침 죽녹원 후문을 마주한 나무와 숲이 잇닿은 한옥이었다. 요란한 음식점이나 기념품 가게 없이 정갈한 숲과 마을, 사람의 집이 있어 고마운 밤이었고 더욱 소중한 아침이었다. 담양에서의 아침을 맞는 의례인양, 모든 일정을 시작하기 전 죽녹원의 대숲에 들어섰다.


이른 아침의 죽녹원은 낮의 죽녹원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매표가 시작되기도 전인 아침 숲엔 마을 사람들만이 자박자박 봄길을 걷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이 8시 이전에는 여행자든 주민이든 아침 산책을 위해 표를 받지 않듯, 죽녹원의 숲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마중하는 사람들의 숲이었다. 죽녹원이 생기고 울타리와 매표소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이 숲의 주인이었고 이웃이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죽녹원의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누구도 서로를 구경하지 않고 아무도 서로의 걸음을 막아서지 않은 채 저마다의 호흡으로 걷는 숲의 산책.. 그 아침 숲의 산책 만으로도 담양에서 머무는 여행이 주는 선물은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이동하는 내내, 또 늦은 밤까지 수업과 과제를 마치고 잠든 시원에게 봄이 깃드는 대숲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봄산책은 큰 위로였다. 대숲 깊은 곳에 다다라 숲에 이는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따스한 손을 꼭 잡고 숲의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가만히 서 있는다. 머무는 여행 중에도 멈추어 서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함께 가만히 멈추어 서서 고요해 지는 순간에 도착한다. 이 순간에 다다르려고 그렇게 먼 길을 왔구나.. 마음의 끄덕임이 대숲의 바람처럼 일렁인다. 봄이 시작되는 숲에서 우리의 한 해 살이도 비로서 뿌리의 힘을 모두어 새 잎을 피워올리기 시작한다.  겨울을 건너 봄에 도착했으니..




책방 이목구심서

https://map.naver.com/v5/entry/place/1122897347?c=14135609.038920086,4207940.882789621,13,0,0,0,dh&placePath=%2Fhome%3Fentry=plt


한옥숙소 조아당

http://www.조아당.kr/default/



담양 죽녹원

https://www.juknokw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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