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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YI NA Oct 17. 2022

에릭 로메르_봄 이야기 (1989)

난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는 짓은 안 해요


<Conte de printemps>


  봄이란 어떤 계절인가. 축축하게 모든 것이 얼어있던 찬 바람이 아주 조금씩 걷혀가면서 생명이 싹을 틔워가는 시기다. 그러나 생동 동시에 불안정함을 동반하기도 한다. 모든 생동하는 것에는 새로운 세상과 맞이하는 것 자체가 낯설음이기 때문이리. 또 다른 면에선 겨울 동안 정리되지 못했던 익숙한 것들을 재정비해나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친듯이 사랑에 빠지고 싶은 낭만적인 계절이다. 에릭 로메르 봄 이야기는 이렇게 계절적인 측면에서 인물의 갈등과 해소를 영화로서 보여준다.


    이 영화엔 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잔느, 나타샤, 에브, 나타샤의 아버지. (아버지 빼고 모두 여자들) 잔느는 남자 친구가 여행을 가 버리는 바람에 빈 집에 있고 싶지가 않아져서 파티를 갔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나타샤와 조우하게 된다. 나타샤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잔느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머무르라고 호의를 베풀어준다. 그리고 잔느는 처음 본 여인이지만,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한다고 느껴지기에 그 집으로 간다


왼족이 잔느, 오른쪽이 나타샤

 나타샤는 잔느를 아버지의 방에 머무르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우연히 목욕하고 나오던 길에 출장 갔다가 잠시 들른 아버지와 마주치는 부끄러운 일을 겪는다. 그럼에도 나타샤는 오히려 잔느가 같이 집에 있어줘서 매우 흡족하다며 계속 있어주기를 원한다. 잔느는 그런 그녀에게 어느 정도는 맞춰주며 나타샤의 얘기를 계속 들어준다


  나타샤에겐 고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의 여자 친구 에브와의 불화였다. 아버지는 딸 뻘되는 여자 친구를 두었고 딸은 아버지 뻘 되는 남자 친구를 두었다. 엄마와과거에 이혼한 상태. 두 사람 다 엄마와의 기억,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런 데다가 이 두 부녀는 미친 듯이 사랑을 갈망하는 로맨티시스트들이다. 그래서 서로가 가진 애정 결핍과 이상향 때문에 나이 차 나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 특히 나타샤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사랑 그 자체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대단한 여성 편력 가다. 그래서 나타샤는 대놓고 표현은 안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자유분방함에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와 그의 여친

  그래서 나타샤가 잔느를 아버지와 이어주려고 그렇게 계속 같은 공간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잔느는 철학과 선생이고,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여자이기에 끌리는 것이다. 나타샤는 대화 도중 잔느에게 내가 잘 못 하면 혼내달라 한다. 이렇게 의존적 태도를 끊임없이 보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여자 친구 에브와 불화가 있을 때마다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나타샤를 중재시키기도 한다.


 나타샤의 아버지도 잔느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 에브의 질투도 계속 신경 쓰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모습을 보인다. 그런 남자에게 애초에 마음을 주지도 않았으나 나타샤의 의존성 때문에 그 집에 남아있었던 잔느는 나타샤에게 안녕을 고하고 자신의 집으로 간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희극적이다. 사실 본래 기질이 바람둥이인 아버지보다도 불안정성과 의존성을 보였던 나타샤가 스스로의 오해에 갇혀 있다가, 그 오해를 풀고 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오해의 내용이란 이렇다

  아빠가 엄마 목걸이를 나한테 물려주려고 했어 그 목걸이는 내 18살 생일 때 받기로 돼 있었는데 깜짝 선물을 하려고 나한텐 비밀로 했던 거야 그 사이에 에브가 목걸이를 차는 건 허락했겠지 그런데 내 생일 전날 밤 목걸이가 사라져 버렸어 알고 보니 그전에 아빠가 에브와 파티에 갔는데 나 모르게 목걸이를 빌려준 거야 에브는 그 후에도 목걸이를 돌려주지 않고 계속 차고 다녔어 하루는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 목걸이를 하고 있더라고 나는 아빠가 줬다는 생각이 드니 굉장히 화가 났어 갖고 싶어서가 아니야 그땐 내 선물이란 걸 몰랐거든 하지만 목걸이는 가보였고 에브는 우리 가족이 아니니까 생일 전날에 아빠가 목걸이를 봤냐고 물었어 난 에브가 하고 있는 걸 봤다고 했고 아빠가 그녀에게 주지 않았냐고 했더니 절대 아니라고 하는 거야 그냥 빌려만 준 거라고 너한테 줄 선물이니까 돌려받아서 주머니에 넣어 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잖아 아빠는 확실하게 주머니에 열쇠와 함께 넣어왔다고 했어 문을 열 때 주머니에 있는 게 느껴졌다면서 바로 상자 안에 넣으려고 했었대 하지만 전화벨이 울려서 받는 바람에 목걸이는 잊은 채 그대로 갈아입었지 (혹시 바지 주머니에서 빠진 건 아닐까?) 그런 추측도 가능은 하지만 옷장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어 방에도 더 그럴듯한 얘기가 또 있어 집에 와보니 에브가 아빠한테 예전 옷들을 입히고 있더라고 오래된 것들을 버리려고 한 건데 그게 에브의 유일한 장점이야 그때 옷장을 뒤지 다가 바닥에서 목걸이를 발견하고는 주머니에 넣어서 가져갔을 거야       


이것은 극 중 나타샤의 대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오해의 핵심은 아빠의 여자 친구 에브가 본인을 질투해서 목걸이를 훔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나타샤의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명백한 오해다. 직감이 중요할 때도 있으나 나타샤는 본인보다 지적이고 자신감 있는 에브(아버지의 여자 친구)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계속 사사건건 과민반응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그녀의 직감의 정확성에 신뢰가 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잔느가 신발 상자에서 목걸이를 찾아주고 나타샤는 기쁘게 그 목걸이를 받아 들고는 오해가 풀리듯이 마무리가 된다. 사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꽤 싱겁다. 아버지의 여자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낀 한 소녀가 함부로 타인을 의심, 오해하지 말하자는 도덕적 주제만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잔느의 중심에서 보면 이보다도 신선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난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는 짓은 안 해요'라고 부녀에게 일침을 가했듯이, 나타샤의 아버지가 사람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만 몰입하는 이기적이고 유치한 사랑 방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멋있는 인물이라는 것. 그래서 사실 이 영화는 나타샤보다도 잔느의 그 확고함에 매력이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는 일이 언제나 낭만적이지 만은 않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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