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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Nov 13. 2024

11월 13일

      


수능 전 날이라 한가할 것 같아서 정말 큰 맘먹고 낸 휴가일. 앞으로 해야할 일들이 훨씬 많지만 오늘 만큼은 만족스럽다. 일요일인듯 나 혼자 일어난 텅 빈집의 고요함, 나중에 해도 좋을 정도로 쌓여 있는 빨래통에 옷 들, 기름기 도는 듯한 미지근한 와인 한 컵, 쿠팡 프레시로 주문한 우유 식빵 한 조각이 전부지만ᆢ


이제는 나도 사람들이 어떻게 책도 없이, 대학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 안다. 새벽에 퇴근하고 들어와서 새로 소주 한 병을 마신 채로 잠이 들고, 또 그 날 오후가 되면 알코올에 찌들어 만리장성처럼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이를 닦고 찬물에 머리카락을 적시며 잠에서 깬다. 이렇게 살아가는 순간엔, 여기서 더 무언가 바라는 것이 바보스럽게만 느껴진다.


스타벅스에 가서 그간 못 읽었던 글을 읽는다. 급작스럽게 감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물든 나의 중추신경은 글을 쓰라고 무진장 강요한다. 학술적으로 아직 명칭을 갖지 못 한 호르몬이 마구 뇌속으로 쏟아지는 기분이다.


문득 저녁이 되어 11월 중순의 차가운 공기가 도는 달의 얼굴이 파란 하늘에 떠오른다. 그래, 인생이란 이렇게 달과 하늘을 벗 삼아 살아가는 거지ᆢ 이렇게 티없이 아름답고 감상적인 밤에 나는 여전히 늙지 않은 건강한 여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참 멋진 일로 느껴진다. 강간이라도 당한다면 금상첨화겠지 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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