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는 설단생금, 현실은 묵언수행

녹슬어버린 토크 머신

by 범이

얼마 전 지인과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하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누구보다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애사심 또한 남다르던 그가 퇴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아니 대체 왜?"

"역술가가 그러는데 지금이 딱 홀로서기 좋은 타이밍이래"

"응?"


역술가는 자신의 직업, 연애 스타일은 물론 유전 질환까지 맞추고 현재 심리상태까지 꽤 뚫어봤다며 신앙 수준의 믿음을 보였다. 그렇게 함께 맥주를 마시던 지인 두 명과 나는 그 자리에서 영업 당하게 되어 주말에 사주를 보러 가게 되었다.




설단생금(舌端生金)


"혈압 조심해야겠네요"


내 생년월일시를 듣고 한참을 끄적이던 역술가가 처음 꺼낸 말이다.

"오 제법인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어머니께서 혈압약을 복용 중이시고 나도 작년 건강검진에서 혈압이 조금 높다는 결과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역술가는 나에게 '설단생금'의 사주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주 용어로 혀끝에서 재물이 나온다는 뜻인데 쉽게 말해 말빨로 먹고사는 사주이니 영업이나 강사와 같은 말을 하는 일을 하면 좋을 것이라 조언했다.

팬데믹 이후 혼자 사무실에 출근해 업무를 보며 말하는 법조차 잊어가고 있는데, 혀끝에서 재물이 나오는 사주라니 웃음이 나왔다.


묵언수행 (默言修行)


불교에서는 스스로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수행 중 하나인데 나의 경우 자발적이진 않았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듯이 여러 사정으로 인해 사무실에서 혼자 업무를 보게 되었고, 평소 떠들어 재끼는 걸 즐기던 내가 직장 내 말동무들이 사라지니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사실 사무실에 혼자 출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가끔 혼잣말도 했었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이 되면 "오늘은 뭘 먹을까~"라며 혼잣말을 했다. 다행히 멜로디는 곁들이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혼자 하는 모든 행동을 중계하고 나아가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 흥얼거리던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과 동시에 누가 보고 들은 것도 아니지만 혼잣말을 하는 내 모습을 인지한 순간부터 나는 혼잣말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0000031475_001_20180811102205826.jpg 명상하는 메이저리거 박찬호, 중앙SUNDAY




사무실에 인공지능 스피커를 하나 사둘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출근해 하루 중 하품을 하고 음식물을 섭취할 때 말고는 입을 여는 일이 없고, 오전 내내 말을 하지 않다 식당에서 가서 주문을 하려는 순간 삑싸리나 났던 적도 있다.

말을 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혀끝 폼은 다 죽고 한때 토크 머신 불리던 나는 녹슨지 오래다.

아무리 혼자가 좋고 편해도 소통은 늘 고팠는데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소통할 수 있어 다행이고 앞으로도 사무실에서 혼자 생활하며 입으로 떠들지 못하겠지만 틈틈이 글로 떠들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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