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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타 Jan 17. 2023

두루두루 잘하기vs하나에 탁월하기

아무것도 안 하는 선택지는 없음

한때 제너럴리스트니 스페셜리스트니 하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특정 분야에서 걸출한 전문가가 되는 것이 맞냐, 이곳저곳에서 쓰임새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냐는 질문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나는 내가 제너럴리스트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제너럴리스트로서 살고 싶지 않았다. n년차 사회인인 지금은 어디에 붙어도 제 역할을 해내 줄 아는 제너럴리스트들이 세상을 부드럽게 이끌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이것도 저것도 잘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뭘 해도 평타 이상은 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넌 뭘 해도 잘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나보다 말을 잘하고, 나보다 글을 잘 쓰고, 나보다 손재주가 좋고, 나보다 논리적인 사람들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열 발자국에 한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의 애매한 재능은 무의식 중에 내가 가진 재능을 더 극대화시켜주지 않았던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질 때가 있었고, 현상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다 보니 합리화는 끝을 모르고 계속 됐다.


다행히 나는 인정과 태세전환이 빠른 편이다. 오래지 않아 그 썩은 생각이 그저 부족한 내 실력을 남 탓으로 보호하기 위한 얕은 수작임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못하는 것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머쓱하지만 나는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다. 못하는 일이 천지에 널려있다.


현타: 내가 잘하는 거 이야기해 줘

작음: (해장 라면을 먹으며) 기획

현타: 아 길게 얘기해 줘

작음: -또 왜 발작버튼이 눌렸나 싶어 허공 보며 웃는 중-

현타: 아 빨리

작음: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 나오면 지랄하기>_<


물론 저 말을 뱉은 후 작음이*는 아주 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이후 진지하게 다시 말한 답변은 "필요한 영역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연애 초반, 작음이는 나에게 참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재, 작음이는 나에게 너는 일만 잘한다고 한다. 갑자기 열이 받기 시작한 건 비밀이다.

*작음이: 남자 친구(키가 작음/나한테 20일 날 옷 사주기로 약속함)


그러나 화를 내지 못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못하는 분야는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철저하게 예의만 차리는 수준으로 임해왔기 때문에 잘할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 잘하는 분야가 모두 일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업무적으로는 우수한 평가를 받아왔다. 반면, 흔히 말하는 생활의 지혜는 현저히 떨어진다. 조수석 쪽 사이드미러를 가리는 것이 운전자에게는 큰 고난임을 모른다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차로는 픽업이 어려운 곳에 서 있다거나, 보일러를 틀고 환기를 시킨다거나…


적고 나니 좀 어디 아픈 앤가 싶은데 모든 일은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고이 모셔둔 장롱면허 n년차이기에 운전자가 앞이 아닌 옆을 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지 못했고, 내 딴에는 한적한 곳에 서 있던 것인데 그곳이 주정차 금지 구역 혹은 버스 정차 라인이었다거나, 방 온도와 내부 공기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A.P.T. 는 윤수일이지


어릴 적에는 만들기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작음이지만 어른이 된 작음이는 명백한 제너럴리스트다. 공부야 뭐 학교로 충분히 증빙 가능하고, 나는 1년 넘게 걸린 이직 시도도 뚝딱 해냈고, 회사 행사뿐만 아니라 지인들 결혼식 사회도 뚝딱뚝딱해내고, 신체적 한계로 농구는 불가능하지만 그 외 모든 운동을 잘하며 왠지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되긴 하지만 춤도 잘 춘다.


반면 뒷심은 약하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면 안 그래도 두꺼운 입술을 더 댓 발 내밀게 되겠지만 사실이다. 다재다능한 만큼 다양한 일을 벌이는데 다 수습이 되지는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물티슈 뚜껑 안 닫기, 쓰고 난 휴지 그냥 거기에 두기 등 등짝 스매싱을 유발하는 일도 왕왕 있다.


이러한 부분들 또한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만 볼 줄 아는 경주마 같은 나와, 산책은 나왔지만 실은 동네 참견이 목적인 시고르잡종 같은 작음이가 서로 보완 가능한 관계가 되어주는 차이점 같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요즘의 내가 제너럴리스트일까 스페셜리스트일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난 그냥 인간 투두리스트다. 수 없이 많은 할 일 목록을 가지고 '쟤는 도대체 언제 쉬는 거야?' 싶은 삶을 살고, 그냥 그게 좋다.


<일 년이 걸리든 십 년이 걸리든 해내면 그만>이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그 모든 경험들이 나를 더 크고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같은 것이 있다.


근데 도대체 교정 전의 작음이는 어땠길래 괴물 같은 우유팩 공룡이빨이 자신의 치아와 닮아있다는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사진을 좀 수배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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