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메이트와의 갈등으로 지칠 대로 지쳐버려, 온전히 나만의 공간을 갖기 위해 새로 집을 구하기로 했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고 수업이 끝나면 부동산 사무실 직원과 집을 보러 다녔다. 예산이 적다 보니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하기란 어려웠다. 그렇게 고심하며 고른 집은 학교 근처의 4층짜리 건물에 위치한 3층이었다. 방 2개, 작은 화장실 2개, 거실 겸 주방이 있는 집이었다. 집 월세는 서울 대학가의 원룸 월세와 비슷했다. 이전에 살던 집보다는 두 배 가까이 비싼 셈이었다. 월세만 내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집이라, 필수 가전―즉 에어컨과 냉장고를 사야 했고, 불만 켜면 거실과 방이 훤히 들여다 보여서 커튼도 새로 해야 했다. 꼭 필요한 가구인 침대, 식탁 겸 책상, 화장대도 샀다.
이 주도 채 지나지 않아 새 동네가 꽤 익숙해졌다. 아직 가스가 배달되기 전이라 끼니는 주로 포장해 온 음식으로 해결해야 했다. 근처에 20루피 하는 야채 모모가 있는데, 포장을 원하면 붉은 칠리소스와 함께 담아주곤 했다. 그 옆에는 감자로 만든 튀김류―알루 티끼 Aloo Tikki 같은―, 향신료와 감자, 야채 등으로 속을 채운 사모사 등이 커다란 판에서 튀겨졌다. 간판은 모두 힌디어로 쓰여 있어서 읽을 순 없었지만 대강 손짓으로 이야기하면 되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과점도 두 군데 있었다. 그중 한 군데서 파는 설탕을 뿌린 도넛, 초콜릿을 입힌 도넛, 야채 피자빵 등은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맛이었다. 중국 음식점도 꽤 있어서 주문하면 집으로 배달도 되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었으므로 모든 주문은 전화로 했다.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에 언제나 두세 가지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따뜻한 국물이 그리울 때는 티베트 음식인 뚝빠나 뗌뚝을 찾았다. 가끔은 짜파티와 달 Daal 혹은 커리가 생각나기도 했다. 피자와 맥도널드 햄버거도 배달이 되었다. 양파와 피망, 치즈만 토핑으로 올린 담백한 피자를 특히 좋아했다. 가끔씩 엄마와 통화를 하면, 밥은 잘 먹고 있는지를 가장 염려하셨다.
"걱정 마. 한국에서 보다 더 잘 먹고 지내."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인도의 음식들은 입에 맞으면서도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텅 비었던 집은 점점 온기로 채워졌고 학교생활도 차츰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수업 내용에는 관심이 멀어졌다. 나는 그저 수업시간에 맞춰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혼자 카페에서 음료 한 잔으로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아는 얼굴이 보일 땐 안녕, 이 인사 한 마디면 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는 동급생들이 많았지만, 내가 그들과의 대화에 흥미가 없는 것을 눈치챘는지 모두들 일정거리 이상 나의 영역을 침범하려 하지 않았다.
빈 강의 시간은 학교 곳곳을 누비기에 좋았다. 교수님도 학생들도 없는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서 책을 들춰보는 일, 노트에 몇 글자 끄적거리기, 창문 밖의 풍경, 학생들이 잔디밭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대화하는 풍경을 흘깃 훔쳐보는 것―혼자서라도 세상은 충분히 즐거웠다. 이따금씩 S교수 생각도 났지만, 그는 내 상상 속에서만 살아도 충분했다. 그를 정말 갖으려는 생각은, 품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인도의 큰 축제 기간 중 하나인 디왈리가 다가왔다. 집집마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알록달록한 빛 장식을 해두었다. 밖에서 보이는 베란다에 선으로 된 장식을 길게, 또는 다양한 방식으로 늘어뜨리는 식이었다. 내가 사는 건물 단지에는 오로지 우리 건물 3층, 즉 내가 머무는 곳만 아무런 장식이 없이 캄캄했다. 명색이 '빛의 축제'라 불리는 디왈리인데, 우리 집만 빛이 사라져 버린 디왈리였다. 그 무렵 나는 간이 커져 어둠이 내린 후에도 외출을 즐겨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휘황찬란한 베란다 장식들 사이에 아무 장식도 없는, 텅 비고 공허한 내 마음 같은 3층을 보고 뜻 모를 것이 울컥 올라왔다. 불 꺼진 3층, 빛을 잃은 디왈리, 빛을 잃은 나의 집. 캄캄한 나의 마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