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의 흰옷

평범함을 꿈꾼 일반 사람들, 그들이 만든 호찌민의 현재

by 황금 거북이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여전히 책을 먼저 펼쳐보는 편이다. 빠르게 소비되는 영상과 후기들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어떤 나라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면 자연스럽게 책으로 손이 간다. 이번 호찌민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서와 여행 정보들을 넘기다가, 우연히 한 권의 낡은 중고 도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와 오래된 활자, 그리고 이름조차 낯설었던 작가. 그 책이 바로 흰옷이었다.


이 작품은 1972년에 출간된 베트남 소설로, 전쟁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담고 있다. 제목인 ‘흰옷’은 단순한 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함과 상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힌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거창한 영웅이 아니다. 그저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휘말리며,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전쟁을 ‘사건’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총성과 폭격, 이념의 대립 같은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감정과 선택이 중심에 놓여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일상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 책을 덮고 나면 어떤 장면보다도 인물들의 조용한 시선과 침묵이 오래 남는다.


그렇게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호찌민으로 향했다. 공항을 나서며 처음 마주한 도시는 생각보다 훨씬 활기차고 밝았다. 수많은 오토바이가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흐름,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는 불빛, 거리 곳곳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까지. 이곳이 한때 전쟁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쉽게 연결되지 않을 정도로, 도시는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책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낡은 페이지 속 이야기들이 현재의 풍경 위에 겹쳐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가득한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볼 때면,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나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사람들, 자유롭게 거리를 오가는 모습들 뒤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상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전쟁기념관과 같은 장소를 방문했을 때, <흰옷> 속 장면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와,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실제 누군가의 삶’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여행은 더 이상 관광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도시가 어떤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를 조용히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낡은 중고 도서였던 <흰옷>은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이곳까지 온 책, 그리고 그 책 속에 담긴 과거의 이야기. 그 오래된 종이를 넘기며 느꼈던 감정들이, 현재의 호찌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이 도시를 그저 ‘활기차고 재미있는 여행지’ 정도로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은 결국 ‘보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이해하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흰옷>은 베트남의 과거를 설명하는 책은 아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감정을 통해 역사를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더 깊이 남는다.


호찌민의 밤거리를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을 걷고 있는 나는, 과거의 누군가가 바라던 미래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전쟁 속에서도 평범한 일상을 꿈꿨던 사람들,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다렸던 사람들. 그들의 시간 위에 지금의 호찌민이 존재하고, 그 위를 내가 여행자로서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책을 읽을 것이다. 조금 낡고 오래된 책이라도 괜찮다. 오히려 그런 책일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여행지에서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다시 떠올라, 눈앞의 풍경을 전혀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이번 호찌민 여행에서 <흰옷>이 그랬던 것처럼.

2026년 04월 베트남 호찌민 (여성 박물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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