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영화를 더 많이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내면의 베이스 울림에 누군가는 즐거움을 누군가는 슬픔과 분노로 자신을 불태우는 이 땅의 청춘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이 보이며 무엇을 보려 하는가. 이창동의 영화 버닝."
'버닝'보고 영화적 완성도에 감동 먹었는데 여러 평론가들 스토리 해석과 평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이분들이 정말 영화를 즐기신 건지... 시적 표현의 영화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적어도 그분들은 감동을 못 느꼈을 거라 확신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러 개일 수밖에 없지만 다른 누군가도 저와 같은 감동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 글 적습니다. 모든 내용이 스포입니다. 보신 분들의 머릿속에 남은 영화의 잔상들이 저의 글과 함께 얼개가 맞아지면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길...
(글이 긴 관계로 핵심 Scene은 빨간색으로 핵심 내용은 파란색으로 표시)
Scene 1.TV 화면 속에 트럼프의 연설이 나오며 종수(유아인)는 변기에 오줌을 눈다.
세계를 이끌어 갈 새로운 지도자는 연설에서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경제를 부흥하고 이민자를 내쫓아 세상을 바꿀 것이라며 변화를 약속한다. 이 와중에 종수는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어쩌면 모든 동물이 해야 하는 가장 더러운 일인 배뇨 행위를 한다. 세상의 꼭대기에 있는 분은 변화를 외치지만 밑바닥에 있는 자는 더러움을 뱉어내는 일상의 도돌이표이다.
Scene2. 해미(전종서)의 집과 종수(유아인)와의 성관계
해미의 집은 그녀의 환경과 그녀의 의식을 드러내 준다. 허름한 빌라에 좁디좁은 방에 사는 해미의 집에는 근사한 남산타워가 보인다. 종수를 집에 초대한 해미는 자신의 집을 소개하면서 빛이 안 들어오는 북향집이라고 한다. 잠시 잠깐 빛이 들어오는데 햇빛이 직접 내리쬐는 것이 아니고 그 빛조차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반사광이다. 물질적으로 누구나 멋있다고 할 남산타워에서 반사되어오는 희망과도 같은 빛줄기를 바라보며 종수는 해미의 몸을 탐닉한다. 관계하는 내내 종수는 해미의 몸이 아닌 빛을 쳐다보는데, 이 빛은 해미의 의식과도 같은 존재이다.
해미는 자신의 욕망에 당당하다. 항상 해왔던 듯이 콘돔을 꺼내며 몸의 욕구에 충실하다. 종수는 해미의 의식과도 같은 물질적 욕망(타워)에 반사되어 내리쬐는 희망의 빛을 바라보며 관계한다.
Scene3. 마중 나온 종수의 트럭에서 벤(스티븐 연)의 전화통화
해미와 종수는 트럭 속에서 대화하지 않는다. 벤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다. 그들에게 벤은 미스테리하고 알고 싶은 존재이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벤과 그들 관계의 시작점을 알리는 장면이다.
Scene4. 공황에서 나와 같이 간 식당에서 해미의 말
'죽는 것은 무섭지만 고통 없이 사라지고 싶다.' 감독이 바라보는 청년들의 심리상태다. 이 대사를 통해 조금 더 직접적으로 주제 전달을 하며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영화가 된 것 같다.
Scene5. 벤의 집에 초대된 해미와 종수에게 벤이 꺼낸 말 '메타포'
'메타포'는 이 영화의 핵심 단어 중 하나이다. 벤은 소설 이야기를 꺼내며 '메타포'란 단어를 언급한다. 해미는 메타포가 뭐냐고 반문하고 벤은 웃으며 종수에게 설명해 달라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을 작가 지망생 종수는 천천히 다가와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다.
각자가 '메타포'를 대하는 태도로 영화 이야기는 전개되어 나간다. 뒷부분에 메타포와 이 영화 줄거리의 관계는 상세히 설명하겠다. 우선 메타포를 설명해달라는 벤의 요구에 종수의 화장실을 묻는 행동을 해석하면, 종수의 의식 상태가 드러난다. 벤은 '메타포'의 개념도 분명히 알고 이를 통해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 속에 '메타포'라는 단어를 활용한다. 이에 반해 종수는 메타포를 개념적으로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인 설명을 포기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화장실을 찾는다. 이는 앞으로 있을 미스터리와 오해의 시발점인데, 벤은 비닐하우스를 '여자'의 메타포로 활용하고, 개념으로만 메타포를 알고 있을 종수는 그의 말을 오해하며 실재하는 비닐하우스를 찾아 헤맨다.
Scene6. 종수의 파주집에서 노을을 보며 대마초 흡연하는 장면
법적으로 불법인 대마초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벤과 이를 따라 하는 종수와 해미의 장면은, 이들에게 벤은 같아지고 싶어 하는 동경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Scene7. 노을을 보며 나체로 춤추는 해미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 중 하나였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가장 아름다운 미장센 중 하나 아닌가 싶다. 해미는 자신을 표현해 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인물이다. 대마 흡연 후 즉흥적으로 파주의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상의를 벗어던지고 자신을 표현해내는 몸짓을 하는데, 화면의 왼편 높은 곳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자유로와지고 싶은 그들에게 어쩌면 강압적일 수 있는 한국에서, 세상의 아름다운 노을 앞에 눈을 감고 자신을 표현해내려는 절망적인 해미의 아름다운 몸짓으로 보였다.
Scene8. 파주집에서 돌아가려는 해미에게 창녀냐고 다그치는 종수
벤과 돌아가려는 해미에게 아무데서나 웃옷을 벗지 말라고, 창녀나 하는 짓이라고 종수는 다그친다. 이렇게 말하는 종수 역시 결말 부분에서 벤을 살해하고 옷을 벗어던지는 행위를 하는데, 이는 감독이 해미와 종수를 내용 상 병치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는 사회 밑바닥에 위치한 청년들이 자기 자신의 날 것 그대로를 극단으로 표현할 시 남자는 살인자 여자는 창녀로 보이거나 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피폐한 내면을 상징한다.
Scene9. 차를 타고 돌아가는 벤에게 종수는 언제 비닐하우스를 태울 거냐고 묻는다.
차 조수석에 해미를 태운 벤은 종수의 물음에 '곧',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답한다. 집을 떠나기 전 장면에서 벤은 종수에게 자기의 즐거움으로 비닐하우스 태우기를 말한다.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자신의 페이스 상 가장 적당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비닐하우스는 여자를 의미하고 불태운다는 것은 두 달에 한 번씩 여자를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가지 덧붙이면 벤은 페이스를 언급하는데, 같은 것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행위는 '가진 자'인 그에게 시간의 주기성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영화에서 종수가 좋아하는 소설가로 윌리엄 포크너를 꼽고, 그 이유로 소설의 이야기가 자기 같다고 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소리와 분노'는 몰락해가는 시골 귀족의 이야기다. 종수는 시골에서 몰락해가는 가문을 시골에 사는 자기 가족과 동일시하였고, 소설 속에서 작가는 가문이 몰락하는 이유로 주인공들이 시간관념이 희박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부자 벤의 입에서 나온 시간의 주기성인 '페이스'란 단어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scene10. 종수와 어머니의 대화에서 '우물'
해미는 종수에게 우물 속에서 자기를 구해 준 이야기를 하고 종수는 기억을 못 한다. 비닐하우스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장님과 분식집에서 성실히 삶을 꾸려나가는 해미 어머니와 언니에게 우물의 존재를 묻지만 그들은 그런 거 없었다고 한다. 오직 해미와 같이 우물이 있었으며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종수의 어머니인데, 해미와 종수 어머니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카드 빚.
해미는 새 삶을 욕망하며 외국여행을 떠나고 종수 어머니는 가정을 떠났다. 여기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근원적 인식론이 깔려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욕망하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우물이 있었고 보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없었고 안보이듯이.
Scene11. 포르셰를 사이에 두고 자연 풍광을 보는 벤과 그를 차 뒤에서 훔쳐보는 종수
가장 인상적이 장면 중 하나이다. 해미 살해범으로 벤을 의심하고 뒤쫓는 종수는 혼자만의 착각 속에서 추격전을 벌인다. 벤을 제대로 응시조차 못하고 숨기도 하며 그를 쫓아간다. 물질적 여유가 있는 벤이 도착한 곳은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저수지. 벤과 포르셰 종수가 원경으로 화면에 잡힌다. 벤은 실재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자연풍경을 즐기고 있고 망상 속에 있는 종수는 포르셰를 사이에 두고서만 벤의 뒷모습을 훔쳐본다.
이창동 감독이 청년들을 비판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보아야 할 것은 포르셰와 부자인 벤이 아니고 실재하는 아름다운 풍경인데 '없는 자' 종수는 포르셰를 두고서만 '가진 자' 벤의 뒷모습을 본다. 그것도 몰래 본다. 정작 '가진 자' 벤만이 포르셰를 뒤로 남긴 채 보아야 할 아름다움을 보며 즐기고 있다.
Scene12. 해미의 방에서 종수의 수음 행위
팬터마임을 취미로 한 해미는 없는 것을 실재하듯이 여긴다. 그리고 실제로 느낀다고 한다. 종수도 자신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없는 여자를 상상하며 자위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종수는 여자가 해주는 수음 행위를 느끼는데 자세히 보면 해미가 아닌 벤의 새로운 여자 친구다. 불쌍한 종수는 상상 속의 여자에게도 직접 성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달랠 뿐인 자위행위를 받고 있다. 그도 '가진 자' 벤과 같은 욕구 충족을 하고 싶지만 그는 상상 속에서 조차 간접에 간접의 욕구 충족만 할 수 있는 존재다.
상상 속의 수음 행위를 마친 종수는 현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고 카메라는 줌 아웃을 한다. 방 안에 갇힌 종수를 보여준다. 마치 넓은 세상 속에 혼자만의 공간에 갇혀 열중하는 불쌍한 존재로.
Scene13. 여자에게 메이크업을 해주는 벤
해미를 살해한 변태성욕자로 종수가 의심하는 벤은 화장실에서 콘택트렌즈를 정성스럽게 끼고 메이크업 도구를 챙겨 여자 친구에게 화장을 해준다. 부유한 사람들의 탐미주의적 성격을 보여 줄 수도 있는 장면으로, '없는 자' 종수에게는 상상으로 밖에 대면할 수 없는 여자를 벤은 실제 앞에 놓고 여자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냥 보는 것도 아니고 더 아름답게 보려고 화장을 해주고 더 잘 보려고 콘택트렌즈까지 착용하면서 말이다.
Scene14. 꿈속에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고 미소 짓는 어린아이
집은 집(house)인데 임시적인 느낌이 나게 하는 비닐하우스는, 거주하지 않고 정착하지도 않는 자신의 여성 편력을 암시하는 벤의 농담이고 은유이다. 메타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메타포의 대상 해미는 벤의 친구들 앞에서 그들에게 이질적으로 들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그들은 해미의 말을 즐거워하며 한낱 유희로 그녀를 소비한다. 벤은 하품을 하고 벤의 새 여자 친구도 해미와 똑같이 반복하며 벤은 또 하품을 한다. 그렇게 해미는 사라진다. 원래 없었던 듯이 보이지 않게 된 해미를 찾아 헤매는 종수는 벤을 변태 살인마로 의심한다. 메타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 종수는 하지만 벤의 은유는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의 공상 속으로 빠져든다.
인간적 가치를 무시한 채 이름이 아닌 번호를 부르는 돈벌이에서 등을 지고 종수는 벤에게 있어서는 즐거움일 내면의 베이스 울림을 분노와 광기로 쫓아간다. 벤이 해미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의심과 그가 진짜로 비닐하우스를 불태울 것이라는 허상을 뛰고 또 뛰며 쫓아간다. 그는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채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고 허상에 목매며 자신을 불태운다.
종수는 벤을 뒤좇으며 그가 말한 메타포를 오독하고 벤의 욕망이라 여긴 비닐하우스 태우기를 꿈속에서 오염되지 않는 순수 욕망일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지켜보며 상상으로 욕망을 체험하며 미소 짓는다.
하지만 종수와 해미의 순수한 욕망이 이다지도 슬프고 분노에 찬 광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어 한다. 메타포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그녀의 정신이 백치인 것처럼 해미가 자라온 고향 집은 폐허가 되었고, 무너져가는 종수의 집에는 광기와도 같은 섬뜩한 칼자루들만이 벼리어져 있다. '없는 자'인 이 땅의 청년들에게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부정적인 감정만을 물려받아 내면에 남았고, 그들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는 자유를 상징하는 베이스의 울림이 아닌 슬픔과 분노의 광기만이 들린다. 그들이 그들의 내면에 응하여 극단으로 스스로를 표현해내면 필연적으로 두 가지 선택지에 놓이게 된다. 창녀로 불리거나 살인자가 되거나.
총평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사람들은 네 가지의 각지 다른 반응으로 나뉠 것 같다. 첫 번째는 이해 안 되어 재미를 못 느끼는 부류. 둘째는 불쾌함과 짜증으로 비난하고 싶은 부류. 셋째는 영화의 시적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부류. 넷째는 감독의 세계관에 비판하고 싶은 부류다. 첫 번째는 해미처럼 인생에서 이성적 활동을 개을리 하신 분들이고 둘째는 세계를 해석하는 몇 가지 개념과 이념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종수처럼 개념은 알아도 세계를 즐기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분들이시며 셋째는 벤처럼 아름다움을 즐기시는 분들 넷째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행동양태와 탐미주의를 비판하는 분들이실 거다. 감독은 영화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평행우주론을 연상시키는 대사를 통해 실존주의적 인간의 존재론을 넌지시 내비친다. 완전한 존재의 무에서 여기 또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없을 수도 있고 실존의 선택을 통해 있을 수도 있는 우리 존재들. 영화 '버닝'은 주제가 명확하며 열린 결말을 나타낸다고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창동 감독이 청춘들을 정말 심도 있게 관찰했고 그 결과물을 꽉 짜인 구조로 정말 아름답게 영화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고투하는 이 땅의 청춘들이 존재의 결단을 보여주길 기대하며 감독님은 그가 본 청춘들의 세계를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