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교토의 동북쪽, 히가시야마(東山) 자락의 작은 사찰 긴카쿠지(은각사)는 유독 나와 상성이 좋지 않았다. 5년 전 겨울에는 입장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사찰 입구에서 발을 돌려야 했다. 4시반이라는 교토의 이른 폐장 시간과 킨카쿠지(금각사)에서의 거리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번에는 고쇼(어소)에서 긴카쿠지까지 다녀온 뒤 하루 일정을 마치려고 계획했다. 다만, 킨카쿠지(금각사)에서 고쇼까지 가는 여정이 험난했다. 3,40여분을 길에서 헤매는 바람에 고쇼에서 폐장 시간을 맞이해야했다.
긴카쿠지에 퇴짜맞은 것은 결과적으로 더 좋은 쪽으로 흘렀다. 고쇼를 다녀온 뒤 체력은 사실상 방전 상태였다. 아침 일찍 상쾌한 기분으로 긴카쿠지 방향으로 버스를 탔다. 한 번에 가는 방법이 없어서 교토 대학 방면에서 차를 한 번 갈아탔다. 야사카 신사 쪽에서 긴카쿠지까지는 버스로 15분 정도. 긴카쿠지 방면의 골목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길이었기 때문에 5분 정도 걸어들어가야 한다.
긴카쿠지로 들어가는 길은 히가시야마 방면으로 기분 좋은 골목길이다. 작은 가로수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이 개울을 따라 ‘철학의 길’이라는 이름의 산책로가 길게 이어진다. 독일의 철학자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의 길’ 산책로를 따라 만든 것이긴 하다만 아담한 주택과 귀여운 개울을 따라 걷는 길은 썩 평화롭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는다면 사랑을 속삭이기에 딱이고, 혼자 걷는다면 내면의 나와 만나기에 좋으니, ‘철학의 길’이라는 이름이 꽤나 어울린다.
철학의 길을 따라 걸으면 첫 날의 난젠지까지 갈 수 있다
긴카쿠지는 킨카쿠지(금각사)와 관련이 있다. 정식 명칭은 지쇼지. 지쇼지를 만든 이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 로쿠온지를 만든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손자이다. 조부의 별장에 크게 감명받았던 요시마사는 사찰 부지였던 이곳에 로쿠온지(킨카쿠지)를 본따서 멋진 정원과 금각을 닮은 누각을 만들어 별궁을 뒀다. 이곳도 요시마사의 사후에 선종 사찰로 전환되니, 그것이 지쇼지다.
킨카쿠지(금각사)가 기타야마(北山)문화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긴카쿠지(은각사)도 히가시야마(東山)문화의 중심이 된다. 긴카쿠지의 누각은 칸논덴(관음전)인데, 로쿠온지의 금각처럼 은으로 도금하지는 않았다. 그 별칭에 대해서는 금각과 대비해서 은각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고, 과거 검은 옻칠이 돼 있던 시절, 달빛에 비치면 은빛으로 반짝여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칸논덴(관음전). 내부에 관음상을 모시고 있지만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긴카쿠지는 금각과 닮은 칸논덴(은각)도 유명하지만 하얀 모래가 넓게 깔린 백사탄과 모래로 얕고 단정하게 쌓은 향월대가 유명하다. 백사탄과 향월대로 꾸민 가레산스이식 정원 너머로 빼꼼 보이는 칸논덴의 화면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혼도(본당)
백사탄, 향월대, 그리고 은각
금각 앞의 거울 연못과 비교했을 때 스케일을 작지만 작은 연못 위에 앉아 있는 칸논덴의 모습은 수수한 아름다움으로 빼어남이 금각 못지 않다. 그 외에도 백사탄 옆의 작은 연못에 닿아있는 다소 누추한 건물인 도구도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별장 시절부터 있었던 쇼인(서원, 일종의 차실)인데, 일본에 현존하는 쇼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의 국보 중 하나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쇼인, 도구도와 작은 정원
긴카쿠지를 둘러볼 때는 아침인데도 유독 땀이 많이 났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이끼 정원이 있는 걸로 보아 음기가 굉장히 강한 것 같더라. 이끼 정원의 위쪽으로 둘러 올라가면 짧은 산책길이 나오는데 거기서 긴카쿠지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칸논덴을 은으로 덮으려고 했지만 돈이 부족해서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만약 칸논덴이 은으로 덮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렇게 작은 정원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목조 누각이 가당키나 했을까. 어쩌면 ‘은각’이라는 이름 자체가 금각의 현람함에 눈이 먼 이들의 번뇌를 잠재우는 마법의 이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흑백의 수수함이 주는 아름다움이 금빛 은빛의 화려함보다 더 값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