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째날
날이 밝았다. 결전의 날이 왔다. 최대한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온도는 여전히 33도 언저리. 호텔방은 시원했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청명한 날씨로는 온도를 어림잡기가 힘들었다. 아침 9시의 기온이 33도인데 낮에는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여행은 언제나 신나고 두근거린다.
아침은 어제 편의점에서 사온 주스와 오니기리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로비에 키를 맡기고 비장하게 정문 앞에 섰다. 스윽- 자동문이 열리면서 순간 뜨거운 열기가 온 몸을 감쌌다. 후, 한숨을 한 번 내쉬며 긴장감을 열풍에 희석했다. 그래도 견딜만한 온도였다. 다만 햇살이 너무 뜨거웠다. 다행히 챙이 넓은 여행용 모자가 있었다.
뜨거운 날씨에 양산 없이 여행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교토의 여행지는 대부분 8시반에서 9시면 개장한다. 내 기준에는 꽤나 이른 아침에 나와 거리를 걷는 셈이었지만, 교토의 시간에 맞춘 이들이 우리 뿐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요미즈데라 방향의 여행 번화가 쪽이 아니라 한산하긴 마찬가지였다. 동북쪽으로 약 1.7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첫번째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걸었다. 보통은 버스패스(1인 600엔, 종일탑승권; 차후 설명)를 사서 버스를 타고 다닐 거리였지만, 이 날씨에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시험삼아 오늘 하루는 도보로 여행하기로 결정했던 참이었다.
야사카 신사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나있는 히가시야마 로를 따라 걷다가 하천을 만났다. 날도 더운데 하천을 따라 걷는 편이 조금은 더 시원하지 않을까,생각하여 옆으로 잠깐 빠졌다. 졸졸 흐르는 하천의 모양새가 썩 귀여웠다. 동쪽 산에서 흘러나온 하천은 속이 투명하게 비쳤고, 물내음이 산뜻했다. 하천 변으로 심어놓은 버들나무에 그늘이 드리워 걷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좁은 길을 따라 종종 자동차가 지나갔지만, 경적 한 번 울리지 않는 일본 자동차들은 반가운 행인일 뿐이었다. 골목을 따라 걸으며 종종 만나는 일본풍의 작은 주택들에 비로소 이곳이 교토구나,깨닫게 됐다.
그렇게 그늘과 개울과 작은 목조 집들을 여행동반자 삼아 걸었다. 혼자 여행할 때와는 달랐기에 걸음에도 여유를 장착했다. 사뿐사뿐 그늘을 찾아 걸었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옷 속의 상태도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 그럼에도 서울에서처럼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은 상쾌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출발한지 20여분, 마지막 건널목에서 뙤양볕을 견디고 있을 때, 저 멀리 거대한 붉은 색 도리이가 눈에 들어왔다. 헤아인 신궁의 입구에 도착했다.
도리이는 일본 신사의 앞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문이다. 색이 항상 붉은 색인 것은 아니지만 신사라면 반드시 도리이가 있어 그 너머가 신의 영역임을 알려준다. 일본의 사찰과 신사를 구분하기 어렵다면 입구에 도리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헤이안 신궁은 교토(헤이안쿄) 천도 1100주년을 기념해서 19세기말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만든 신궁이다. 사후에 신이 된 선대 천황들의 신사를 신궁이라고 하듯 헤이안 신궁도 그러한 연유로 일반 신사와는 사뭇 다른 구조가 엿보인다. 대표적으로 20여미터에 달하는 도리이는 어디에도 볼 수 없는 규모다. 오래 전 사라진 헤이안쿄 황궁 대궐 구역의 정청을 토대로 5/8로 축소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를 황궁 건축 양식으로 만들었다.
옛 헤이안쿄의 황궁의 지도를 보면 가운데 대궐 구역이 지금의 헤이안 신궁과 유사한 모습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붉은 빛 정문(응천문)을 통과하면 넓은 안뜰 너머로 기다란 신전이 나온다. 안뜰은 작렬하는 태양 밑에서 더 하얗게 불타며 하얀 바다를 연상시킨다. 붉은 빛 신전은 동서의 날개를 늘어뜨리고 휴식을 취하는 봉황의 형세를 빼닮아있다. 1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었다는 신궁치고는 예상 외로 작았다. 우익의 화려한 누각을 따라 한바퀴 휙-돌면 그것으로 헤이안 신궁은 끝이다. 본당 안쪽으로 올라가면 신의 위폐를 모시고 있는 장소를 엿볼 수 있지만 행사 때가 아니면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듯 하다. 사실 신전의 후원 격인 신엔을 보아야 헤이안 신궁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을테다. 다만 10시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점점 땅이 달궈지는데 태양과 싸우며 넓은 정원을 걸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신엔은 다음으로 기약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