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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니 Oct 07. 2022

2년 동안 고마웠어요

스타트업에 다니면서 얻은 건



마침내 또 다른 출발을 할 때가 왔다보다.


지금 회사에서의 여정은 2년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을 듯 하다. 그렇다, 바로 퇴사와 이직 준비. 물론, '아, 이런 그지 같은 회사, 때려쳐!!' 라는 식의 무책임한 이별은 아니다. 회사도 나도, 성장을 위해 서로에게 변화가 필요한 타이밍이란 합의(?) 하에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다.






2년 전, 도무지 발 디딜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망망대해 위에서 눈물을 훔치며 그저 나아가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던 그 때, 조그마한 섬 같은 지금의 회사를 발견했다.


이리저리 넝쿨이 뒤엉켜있고 움푹 패인 구덩이로 가득한 흙길이었지만, 어딘가 정감 있고 따뜻한 곳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즐길 수 있도록 보기 좋게 꽃도 심고, 걷기 좋게 길도 다듬고, 동해번쩍 서해번쩍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힘썼다.


BX 전략 구상부터 브랜드 콘텐츠 기획과 디자인, 인스타그램과 커뮤니티 운영, 반응형 웹 기반 서비스 기획과 UXUI 디자인까지. 이제 막 태동한 브랜드의 모든 온오프라인 접점을 내 힘으로 하나씩 일궈나간다는 점이 뿌듯했고, 개발자와 마케터 바로 옆에 붙어서 일 해본 건 흥미로웠지만,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을 하며 디자이너로 혼자 일했던 2년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디자이너 동료가 있다면

전문적인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선배나 리더가 있다면

그런 동료와 리더가 모인 디자인 팀이 있다면

디자인의 가치에 좀 더 공감해주는 환경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느껴지던 중. 회사의 성장이 기대보다 더디자 브랜드와 프로덕트, 콘텐츠를 디자인을 위한 일보다 당장 매출과 운영에 필요한 단순 업무를 하나 둘 겸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론 다른 직무를 제안 받게 되면서 '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BX 디자인인데. 이곳에서 성장하기는 어렵겠구나' 라는 씁쓸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얻은 게 많다. 아니, 솔직히 얻은 것 밖에 없다. 원했던 인하우스 브랜드를 위한 디자인을 해봤으니 커리어 측면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귀한, '사람들'을 얻었다.


동료들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 덕에 그들의 말과 행동, 생활양식은 나에게 낯설지만 그야말로 호기심 대상이었고,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같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정말 많은 배움을 얻었다.


H : 전 활동적인 취미를 좋아하는데, 특히 서핑! 한 겨울에도 서핑을 할 정도로 좋아해요.

J : 이렇게 만나게 돼서 진짜 반가워요! 저 새로운 사람 만나고 다니는 거 좋아하거든요.

B :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업무적인 부담은 좋지만 (웃음) 우리끼리 지내는 데 부담 가질 필요는 없잖아요.

M : 전 짐니님이 뭐든 잘 할 것 같은데, 뭘 그렇게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어요.

S : 제가 아무나 한테 말을 잘 거는 건 아니고, 저도 용기 내서 먼저 말 거는 거예요!



물이라면 일단 고개부터 저었던 나는, 여름 휴가에 첫 서핑을 해봤고.


새로운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에 질식해버릴 것 같았던 나는, 밑미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브런치를 먹는 프로그램을 신청했고.


직장에선 말은 되도록 아끼는 게 좋다며 점심 후면 조용히 나가 혼자 산책하던 나는, 주말에 동료와 함께 공연을 보러가기도 하고.


날 필요로 하는 곳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며 자학하던 나는, 적어도 지금은 어딜 가서도 잘 할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고.


괜한 자격지심에 주변 지인들과 연락을 끊었던 나는, 전 직장 동료의 인스타 스토리를 보고 서스럼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가 2년 만에 만나 이 다음을 기약했다.





그들은 나에게 ‘여유로움’이 뭔지 가르쳐 주었다.


예전엔 남에게든 스스로에게든 각박하게 굴었다. 카멜레온처럼 주변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는, 긴 취준 시간과 시대를 역행하는 이전 직장의 조직문화로 ‘나’ 라는 울타리에 못을 단단히 박아 왔다. 울타리 밖에 있는 모든 것들에 무관심했으며, 울타리 안에서 조차도 멀찍이 거리를 두곤 했다.


이번 회사는 정반대였다. 실수를 두려워하고 질책하기 보단 다같이 문제 해결에 힘쓰며 칭찬은 아끼지 않고 닳을 때까지 해주는 동료들은, 내 울타리를 형형색색으로 칠하거나 서스럼 없이 넘어 와서 손을 붙잡고 나가기도 했다.


와, 울타리 밖은 정말 다채롭고 재미있었구나.


확실히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니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지금은 그들처럼 내가 먼저 주변 사람들의 울타리를 두들기러 나서는 대담함과 해 본 적 없는 어려운 일도 대수롭지 않게 품을 수 있는 자신감으로, 꽤나 넉넉하고 느슨한 울타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출발 직전이 가장 두렵다. 이만한 회사를 찾을 수 있을까? 이만한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안정감이 주는 달콤함이 아니라 두려워서, 여태 계속 망설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적인 건, 지금 회사에서 첫 걸음을 떼기 전에도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는 거다. 두 걸음, 세 걸음... 지금 돌이켜 보니 어느새 발자국이 셀 수 없을 만큼 찍혀있고, 내 주변엔 좋은 동료들이 하나 둘 모였다. 새로운 곳에 또 다시 첫 발을 내딛는대도 나도 모르는 새에 무수한 발자국을 찍으며, 낯설지만 호기심으로 가득한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2년 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울타리 안에서 가뭄 같이 메말라갔던 저에게 아낌 없이 물도 주고, 마침내 새싹이 자랄 수 있게 해주셔서요. 우리, 오래 가끔 자주 만나요. 안녕!





ps. 스디공과 스디생이 여기서 끝은 아니예요. 2년 간 적지 않은 일을 했을 뿐더러, 다시 시작하는 항해 끝 새로운 어딘가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 얻었고 또 얻어갈 인사이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스타트업 디자이너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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