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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니 Aug 11. 2021

1년 이상 모았던 영감, 실무에 써먹은 일

브랜드 경험을 만드는 일



 영감을 모았냐면


프롤로그에서 말했듯이, 주변에서 얻은 영감과 인사이트를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2년 가까이 기록하고 있다. 시작한 이유는 BX디자인을 잘 하고 싶어서였다. 주변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훈련을 하면 브랜드 경험을 설계할 때도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매장들이 아이스크림을 고객들이 직접 떠먹을 수 있게 스푼과 접시만 갖다 놓으면 고객들이 행동하고 경험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아이스크림을 떠서 어디로 가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설계해야 고객들은 움직인다.

- 이랑주, <오래가는 것들의 비밀>




영감을 모아보니


가장 큰 변화는 디테일을 발견해내는 기민한 시선을 기른 것이다. 연남동에 한 개인 카페에 방문했을 때다. 노트북 작업을 하기 좋은 카페라 해서 찾아서 간 곳이었다. 1층에서 주문을 마치고 2층에 자리를 잡자 마자 보인 건 모든 테이블 옆면에 붙은 가방걸이였다. 대부분 2인석이라 2명이 자리에 앉으면 남는 의자가 없어 가방을 둘 곳이 마땅치 않다. 의자 뒤에 걸거나 차라리 바닥에 내려놓을 수 밖에 없다. 사장님은 그 불편함을 파악했으리라. 트북 작업하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난 이유에는 가방걸이도 알게 모르게 한 몫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녀온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도 디테일이 좋았던 카페를 꼽아보라고 하면 이곳이 떠오른다.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디테일이 공간을, 더 나아가서는 브랜드 이미지를 만든다.

1년 전, 카페 공그로트에서 찍은 사진

 



잘 모아둔 영감,

이제는 써먹을 때


또 다른 변화는 제대로 쌓아가는 레퍼런스다. 눈으로만 보고 흘렸거나 무의식하게 사진만 찍어 놓았다면 쉽게 잊었을지 모른다. 누군가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하고 물어보면 꼭 맞는 레퍼런스를 제안할 수 있길 바라며 자료도 조사하고 생각도 붙여가며 정성스럽게 정리했다. 마침내 BX디자인을 하면서 잘 모아둔 영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중 공유하고 싶은 5가지 사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종이 포장 택배

종이 포장 택배를 처음 접했을 땐 새로운 방식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다 하나 둘, 받는 빈도수가 늘다보니 종이 포장을 어떻게 했는지 알게 되었고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느꼈다.

마켓컬리에서 택배를 받았을 때

어느날엔 이벤트에 당첨된 고객에게 보낼 사은품을 택배로 포장하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준비된 건 비닐테이프였다. 우리는 물건을 판매하는 브랜드가 아니라서 택배를 보내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그래도 친환경 생활을 지향하는 브랜드인데 이 부분을 개선하면 메시지가 더 잘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모아둔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도 다음 번에는 종이테이프와 종이완충재를 사용하자는 의견을 냈고, 그후로 택배를 보낼 때마다 종이 포장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2. 반전의 공간

나는 안도 타다오의 건축을 좋아한다.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4학년, 과제 때문에 온전히 타의로 읽은 <나,건축가 안도타다오>에서 <빛의 교회>를 처음 봤을 때 느낀 전율은 지금도 선명하다. 어둡고 좁은 통로 끝, 조명도 없이 오로지 자연의 빛으로 만든 십자가라니. 책에서도 웅장함과 신성함이 느껴지는데 현장에선 어떨까 싶었다.

책으로 간접경험만 하다가 마침내 강원도에 그가 지은 뮤지엄산에 갔을 때다. 긴 콘크리트 벽을 따라 걷다가 벽이 끝나는 지점을 끼고 돌아서는 그 순간. 첩첩산중 물 위에 떠있는 듯한 건물과 조형물이 엄청난 오라를 뿜어냈다. 좁은 시야가 한순간에 트이면서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뮤지엄 산에서 찍은 사진

우리 브랜드는 오프라인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입사 초에 대표님은 공간 일부를 리뉴얼할 건데 나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지 물었다. 우리 공간은 낡은 회색 건물로 둘러싸인 도심 속에 있다. 반대로 휴양지처럼 밝고 따듯한 분위기 때문에 잡지에 소개된 적도 있다. 환경과 공간이 가진 반전 매력을 더 극적으로 경험하게 만들고 싶었다.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로비를 어둡게 만들면 목표를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브랜드 컬러인 초록색을 벽과 천장까지 칠 하자고 제안했다. 대표님은 천장까지라는 말에 처음엔 우려를 표하셨지만 한 번 해보자며 의견을 받아들여 주셨다. 덕분에 도심 속 숨은 아지트처럼 더 비밀스럽게 연출되었고, 재오픈 후 동료는 물론 많은 고객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3. 부드럽고 강한 문구

작년 어반스페이스오디세이(USO)에 방문했을 때, 2층에서 진행하는 더콰이어트의 소장품 전시를 봤다. 취향이 가득 담긴 물건을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보다 앞에 붙은 작은 종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USO에서 찍은 사진

아티스트를 소중하게 대하는 주최측의 진심을 느꼈다. ‘만지지 마세요.’ 혹은 ‘눈으로만 보세요.’ 보다 표현은 부드러우면서 효과는 더 강력했다.


앞서 이야기한 오프라인 공간을 리뉴얼하고 나서 인테리어를 위해 물건을 들이기로 했다. 동료들이 기꺼이 가져온 개인 소장품과 콜라보했던 브랜드가 보내준 물건을 전시했다. 우리에게 소중한 물건인 만큼 공간을 방문한 고객도 소중하게 다루어 주길 바랐다. 물건 앞에 안내 문구를 두자는 이야기가 나옴과 동시에 나는 위 사진을 보여주었고, 동료 에디터와 함께 우리다운 안내 문구를 만들었다. 이후 새로운 물건으로 교체하기 전까지 파손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4. 향을 담은 유리병

카페 중에서도 특히 개인 카페를 좋아한다. 개성 있는 메뉴를 맛보기 위함도 있지만 어떻게 공간 연출을 했는지, 어떤 디테일을 심어 놓았는지, 사람들은 어떤 포인트를 좋아하는지, 관찰하는 재미가 크기 때문이다. 많은 카페를 다니다 보니 커피에 자신 있는 곳에서 발견한 공통된 디테일이 있다. 원두를 담은 유리병을 카운터 근처에 두는 일이다. 주문을 하려고 타운터 앞에 서면 아무래도 시야에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유리병을 집어들고 향을 맡아본다. 고소한 커피향이 코끝에 아른거리면 그저 빨리 이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카페 앙떼띠에서 찍은 사진

리뉴얼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콜라보 브랜드가 보내준 물건에는 차(Tea)가 있었다. 이 브랜드는 인공 첨가물 없이 현지 천연재료로 손수 만드는 차를 판매하는데, 동남아 여행지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향이 매력이다. 향을 맡자마자 카페에서 본 유리병이 떠올랐다. 공간을 방문한 고객도 이 매력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바로 다음날, 코르크 마개가 달린 유리병을 직접 가져와서 찻잎으로 채우고 선반 위에 놓았다. 반듯하게 포장된 상품만 나열된 선반에는 리듬감이 생겼고, 뚜껑을 열 때마다 은은하게 퍼진 향은 공간의 분위기를 더 생기있게 바꿔주었다. 



5. 길을 안내하는 스티커

연남동에 빈티지 연필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흑심'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건물 3층에 위치해 있는데, 처음 방문했을 땐 이 건물이 맞나 싶었다. 시간의 흔적도 깊어 보는데다 1층엔 커다란 카센터가 자리했기 때문이다. 의심이 들 때쯤 건물 바닥과 벽에 붙어있는 연필 스티커를 발견했다. 아, 여기가 맞구나. 연필의 흑심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올라가니 어느새 진짜 흑심에 다 다르게 되었다.

흑심으로 올라가는 길에 찍은 사진

우리 브랜드 공간도 흑심과 정말 유사하다. 건물 4층에 위치한데다가 1층엔 커다란 인쇄소가 있으니, 처음 온 고객은 적잖히 당황스러워 한다. 그때 고객을 반겨주는 장치로 흑심에서 본 스티커를 떠올렸다. 우리 브랜드는 도심 속 휴양지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으니, 모래사장에서 모티브를 얻은 발자국 스티커를 올라오는 계단에 붙여보자는 의견을 냈다. 다른 회사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라 아직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긍정적으로 논의는 해보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영감을 만드는 사람


영감을 수집하는 사람이 아닌 영감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동료에게 내 의견을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했고, 실행하기 위한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건 만드는 사람의 노고를 아는 일과 충분히 감동하는 마음가짐이었다어떻게 우리 메시지를 잘 전달할까, 어떻게 고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까. 수많은 생각과 손길로 탄생한 크고 작은 접점들은 발견되지 못할지언정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받은만큼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열심히 영감을 모으고 다듬는다.


나는 무언가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 있지, 더 이상 무언가에 '관해'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있지 않다. (...) 즉 실천의 형태로 다가온다. 나는 또 다른 유형의 앎으로 넘어간다.

- 롤랑 바르트, <소소한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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