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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Oct 25. 2023

보호 좌회전

비보호 좌회전


 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를 달리게 하는 쪽은 남편이고, 나는 항상 조수석에 있다) 신호등 위에 달린 파란색 표지판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왼쪽으로 꺾인 화살표와 그 아래 쓰인 ‘비보호’ 표지판. 도로 위의 질서와 안전을 책임지는 신호등의 본분과 정면충돌하는 세 글자. 신호등이 왜 좌회전 차를 보호해 주지 않는 거야? 나의 근원적 물음에 남편은 좌회전 신호를 따로 두면 교통 체증이 심해진다는, 어쩐지 동문서답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궁금한 건 교통 체증 따위가 아니라 왜 좌회전하는 차는 신호 체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거냐고? 차가 막히는 것보다 안전이 더 중요하잖아? 약간 흥분하며 말을 쏟아내는 내게 남편은 운전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완벽한 동문서답을 내놓았다.     


 사전에 비보호 좌회전은 ‘교차로에서 별도의 좌회전 신호를 주지 않고 직진 신호일 때 좌회전을 허용하는 신호 운영 방식으로 직진과 회전 교통량이 적은 교차로에서 행하며, 신호 주기가 짧고 지체가 적어 효율성이 높다’라고 등재되어 있다. 쉽게 말해 교차로에서 1차선에 대기하는 좌회전 차량으로 인해 직진 차량이 늘어져 교통의 흐름이 동맥경화를 일으킨 혈관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직진 신호에 녹색불이 들어오고 반대 방향에서 차가 오지 않을 때 좌회전을 한다. 나는 간명하게 풀이되는 이 말이 명징하게 와닿지 않았다. 국가가 운영하는 신호 체계가 그럴 리 없겠지만, 효율성을 위해 안전을 담보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반대 차선의 차는 아가리를 벌리며 점점 가까워지고 참을성이 없는 뒤차는 잡아먹을 듯 경적을 울려대면? 나는 아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핸들을 부여잡고 그대로 머리를 박을 것 같다. 벽관에 갇혀 고문당하는 것처럼 핸들과 의자에 꼼짝없이 붙박인 채.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비보호라는 말을 승리의 깃발처럼 내걸어놓냐고 따지는 내게 남편은 당신 같은 사람들은 운전하면 안 된다는, 세 번째 동문서답을 내놓았다.     


 반대쪽에서는 끊임없이 차가 오는데 행렬처럼 늘어선 차들의 선두에 있다는 상상만으로 아찔하다. 어째서 안전하게 이쪽저쪽의 갈 길과 타이밍을 알려주는 ‘보호 좌회전’은 안 되는 것일까? ‘보호 좌회전’이 아닌 상황에서 나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자칫 사고와 직결되는 상황을 개인의 판단에 맡기고 보호해 주지 않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 것일까? 이처럼 겁이 많아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아이들도 걸음이 빠른 ‘뚜벅이’로 자라고 있다. 남편이 출근한 휴일, 동성로 구경을 하기로 한 나와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갔다. 대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중앙로역에 내렸다. 지하철 한 정거장이지만, 지하철이 없는 지역에서 뚜벅이로 사는 아이들에게 두 다리의 고단함을 덜어주고 신문물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앙로역에서 내려 동성로로 올라가는 길에 우리는 새까만 그을음이 묻은 지하철역 기둥이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십여 년 전까지 대구에 살 때 매일같이 타던 지하철역에서 늘 보았던 원기둥이었다. 아마도 올리브 빛이었을 그 기둥은 그을음으로 덮여 있었고 누군가의 애끊는 마음이 글자로 그을음을 지우고 있었다.     


 기둥에 가까이 다가가자 잊고 지냈던 2003년 2월 18일 그날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막 스무 살을 지난 겨울 방학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 맞은 겨울 방학이었지만, 3월이 되면 벌써 2학년이 된다는 허탈함으로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내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늦잠을 푸지게 자고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 사는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웬일이야?” “아, 다행이다. 전화받았네.” “응? 뭐가 다행이야?”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 불났다고 해서. 너 시내랑 가까운 데 산다고 했잖아.” 전화를 끊고 TV를 틀자 친구가 어떤 마음으로 전화를 했을지 짐작됐다. 능청스럽게 귤을 까먹으며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할 때가 아니었다. 우리 집 가까운 곳에서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그 시간에 지하철에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들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다행이라고 감히 말해도 될까. 그날 불행은 우리 집 현관문을 뜯고 쳐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집을 비켜 간 불행은 다른 이들의 가족이었을 19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원기둥 앞쪽에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억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기억공간 안으로 들어서자 녹아내린 20년 전 광고판, 20년 전 공중전화, 20년 전 은행 공용 현금지급기, 20년 전 신문 가판대가 그날의 참혹함을 알려 주었다. 그을음이 원유처럼 찐득하고 새까맣게 붙은 벽에는 가족들의 그리움도 빼곡히 붙어 있었다. 너를 한번만 다시 안아 보고 싶다는 통절한 마음이 벽에 붙은 그을음을 지우며 쓰여 있었다. 기억공간의 끝에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출생연도가 새겨진 추모의 벽이 있었다. 아이들과 그 이름들을 가만히 하나씩 읽어 보았다. 돌 하나에 새겨진 세 글자의 이름과 그 옆에 나란히 붙은 두 개의 숫자. 75 79 82 84 31 38 42 45 51 55 61 69 28 23 94 96. 재가 된 그들의 고유성을 붙들려는 돌이 서로 맞물린 벽 아래쪽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무색의 순수한 투명 유리라는 뜻의 이름 뒤에 붙은 83. 백설공주처럼 하얗고 캔디처럼 예쁜 곱슬머리는 가진 그 아이. 같은 초등학교였지만 한 반이었던 적은 없었던 그 아이. 다른 중학교였지만 같은 학원에서 같이 수업을 들은 뒤로 동네에서 마주칠 때면 꼬박꼬박 인사를 했던 그 아이. 같은 대학교 다른 과였던 그 아이. 이제 막 스무 살을 지난 그 아이. 그날 이후 동네 전봇대에 붙은 희생자들의 사진 속에서 투명한 유리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아이는 어떤 미래를 꿈꿨을까?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 불이 났다. 중앙로역에 정차한 1079번 열차에 50대 남성이 불을 질렀다. 불은 반대편 선로에 진입한 1080번 열차로 옮겨붙었고 두 대의 열차와 중앙로역을 무자비하게 태웠다. 불이 열차와 역사를 잡아먹는 동안 지하철 관제센터도 기관사도 승객들에게 지금, 이 길로, 빠르게 대피하라는 ‘보호 신호등’을 켜 주지 않았다. 전원이 차단된 열차와 승강장은 암흑 상태로 유독 가스가 가득했고 열기로 녹아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목을 죄는 매캐한 연기, 살을 녹이는 뜨거운 화기로 가득한 지하 3층에서 계단을 찾아 올라가 지하 2층의 개찰구를 지나고, 지하 1층의 상가 구역으로 올라가 지상 출구를 찾는 것이 가능했을까?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눈앞이 캄캄한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표지와 표식을 보고 판단해야 했을까?      


 기억공간에는 1080번 열차의 출입문 일부가 전시되어 있었다. 희생자들이 끝까지 밀었을, 열리지 않았던 손잡이가. 그날 열리지 않았던 출입문은 희생자들을 비보호 좌회전 신호 아래 가두었다.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오는 반대 차선의 차처럼 앞에서 덮쳐오는 불길이었고, 참을성 없이 경적을 울리며 쪼아대는 뒤차처럼 뒤에서 덮쳐오는 연기였다. 희생자들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제때 ‘보호 신호등’이 켜지고 대피 시스템이 작동되었다면, 나는 백설공주처럼 하얀 그 아이와 동네를 오가다 인사를 나누겠지. 어떻게 살고 있냐고. 결혼은 했냐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우리 벌써 마흔이라고.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냐고.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라고.’ 어린 날 밤새 듣던 라디오에서 계절마다 흘러나오던 그 노래처럼 우리 오가다 지천명 전에 또 보자고. 그때까지 잘 지내라고. 그때까지 잘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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