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중아 Jun 02. 2022

[20220523-24] 16. 지리산 거중종주

한장요약: 들끓는 욕망과 제한된 능력, 그 사이의 균형을 찾아서


어릴 적 어느 겨울, 온 가족이 지리산에 올랐었다.
그때는 지리산이 무슨 산인지도 모르고 그냥 아빠가 가자는 대로 따라나섰고, 노고단이 그날의 목적지라고만 알고 있었다.
바람이 꽤나 매섭고 매우 추운 날씨로 기억하는데 노고단을 코앞에 두고 엄마의 천식기가 심해져 어쩔 수 없이 돌아섰던 기억이 내가 기억하는 지리산의 전부이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가족끼리 여기저기 잘 다녔던 것 같다. 부지런한 울 아부지!)

2022년 목표 중에 하나가 국립공원 10곳 이상 등정, 이었는데 덕유산, 태백산, 북한산, 무등산에 이어 대망의 지리산에 도전하게 되었다.
"오늘이 5월 대피소 예약 맞나?"라는 나의 무심한 한마디에 말보다 행동이 빠른 친구가 잽싸게 세석 대피소 예약에 성공했다.
나를 빼고는 다들 중급 이상의 산쟁이들이라 같이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대피소 1박 덕에 아주 어렵지는 않은 코스로 계획했다.
서울에서 이동 시간이 꽤 길지만 첫날은 여유롭게 거림-세석 (5km), 둘째 날은 촛대봉 일출을 시작으로 연하봉-장터목대피소-천왕봉-중산리 하산(11km) 코스로 계획하였다 (계획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피소가 처음인 나와 친구는 신이 나서 식사 메뉴 선정에 신중을 기했고 대피소 준비물을 열심히 검색해가며 준비물 리스트를 꼼꼼히 수정했다.

대망의 출정일, 목동에 모여 내 작은 차에 4명의 큰 배낭을 쑤셔 넣고 드디어 출발.
월요일 출근시간과 맞물려 조금 막히긴 했지만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와 안성휴게소에서 가볍게 아침을 먹고 다시 중산리로 내달린다.
나름 서둘렀지만 아무래도 점심까지 챙겨 먹을 시간은 없을 것 같아 혹시나 하고 검색해뒀던 지리산버거를 포장해 테이크 아웃한다.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해 각자 가져온 음식을 4개의 배낭에 적당히 나눠지고 콜택시로 들머리인 거림으로 다시 이동.
아침 6시에 일어나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인 것 같은데 거림탐방지원센터에서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가 넘었다.
우린 세석대피소에 숙박 예약을 해두어서 입장시간 제한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대피소 신청과 탐방로 신청이 별개라는 걸 몰랐어서 현장에서 탐방로 예약을 해야 했다.
드디어 모든 절차를 마치고 본격적인 산행에 돌입한 시간이 오후 2시 22분.
세석대피소까지 5km는 지리산 안내도 기준 난이도 보통인지라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길어봐야 하루 12km 산행, 어려워봐야 눈꽃산행 경험이 전부인 등린이의 첫 봇짐 산행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음식을 집어넣느라 침낭을 배낭 위쪽에 올렸더니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았고, 당근에서 주워온 큰 배낭을 처음 매본 지라 내 몸에 핏되게 조정하는 데에도 서툴렀다.
생각보다 무거운 짐을 불필요하게 흔들거리면서 오르느라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고 얼굴엔 열이 나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상태를 본 일행들이 버거라도 먹고 가자며 오른 지 30분 만에 계곡에 자리를 잡았고 나도 덕분에 숨을 돌리기로 했다.
지리산 흑돼지가 들어갔다는 지리산버거는 예상보다도 훨씬 맛있어서 (물론 그때가 이미 3시 반 경이라 배가 고파서 그랬을지도) 다음에도 중산리에 오면 꼭 다시 먹기로 다짐한다.

버거를 먹고 다시 배낭을 추스르는데 덜렁거리는 헤드쪽에 침낭을 최대한 조여주고 허리끈도 바짝 졸라매니 한결 힘이 덜 드는 듯하다. 잠시 깔딱도 지났지만 그래도 위쪽에는 연달래가 만발해서 사진도 종종 찍어주며 살랑살랑 올라간다.
해 지는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올라가기만 하면 맛난 저녁도 바로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점점 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어느 순간 위를 쳐다보는데 나무가 아니라 파란 하늘이 보이며 마치 숲 속의 별장처럼 아름답게 등장한 세석대피소와 그 아래 약수터.
대피소에서 내다보는 연달래 만발한 세석평전은 가히 지리산 10경에 들만 하다 싶었다.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이고지고온 고기와 음식들을 꺼낸다.
초벌된 삼겹살은 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금방 익어 오래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어 좋았고 어젯밤 우리 집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챙겨간 고기 친구들 (명이나물, 갓김치, 토하젓)도 인기가 많아 다행이었다.
고기만 먹다 보니 좀 느끼해질 무렵 비장의 쭈꾸미 볶음(역시 밀키트)을 넣어 쭈삼으로 종목 변경, 기름진 속이 칼칼하게 진정된다.

그리고 역시 K-디저트는 볶음밥!

배를 채우고 내일의 일출 산행을 위해 일찍 대피소에 자리를 잡는다.
코로나로 정원의 30%만 예약이 가능해 혼자서 3명 자리에 가로로 누워서 자도 될 정도이다.
양치 대신 가글로 한 번 헹궈주고, 클렌징 티슈로 얼굴을, 샤워티슈로 온몸을 닦아내니 조금이나마 땀이 닦이는 개운함에 깔끔하게 잠자리에 든다.
피곤했는지 바로 잠이 들긴 했지만 소문대로 히터 빵빵한 대피소 난방 덕에 12시에 눈이 떠지고 말았다 (코 고시는 분도 계셨지만 챙겨간 귀마개 덕에 아주 거슬리지는 않았다).
바깥의 화장실 (무려 수세식!) 다녀오며 밤하늘의 별구경까지 하고 나니 잠이 확 깨버려서 궁여지책으로 독한 알러지약을 먹고 다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새벽 4시, 알람을 듣자마자 일어나 다시 주섬주섬 짐을 꾸려 나간다.
오늘은 꽤 길고 어려운 코스가 예상되어 바쁜 와중에도 누룽지까지 든든히 챙겨 먹고 일출을 보러 촛대봉으로 오른다.
아쉽게도 구름이 낀 날씨라 또렷한 일출은 아니었지만 늦게나마 구름 사이로 얼굴을 보여준 수줍은 햇님을 보며 오늘도 무사한 산행이 되기를 기도한다.

촛대봉을 내려와서는 능선길이 이어진다.
역시 지리산 10경에 손꼽히는 아름다운 연하선경을 돌아보며 숨을 고른다.
장터목 대피소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은 크게 가파르지도 않고 엊저녁에 먹은 음식만큼의 무게도 덜어지고 침낭을 배낭 안에 쑤셔넣으니 한결 가볍게 걸을 수 있다.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해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아침 메뉴는 소고기버섯두부전골 (feat. 김구원 선생님 ㅋㅋ).
알찬 밀키트에 버섯까지 추가하고 싸온 밑반찬까지 더하니 풍성한 아침이다 (역시 먹은 만큼 배낭은 더 가벼워져 1석2조).
어젯밤 코 고는 소리와 높은 온도 탓에 잠을 못 잔 일행들이 잠시 눈을 붙이고 에너지를 충전한다.

화장실(여기는 푸세식)까지 다녀오고 다시 힘을 내어 마지막 관문인 천왕봉으로 출발.
어느 정도 경사도는 있지만 나름 육지에서는 대한민국 최고봉이니 이 정도는 돼야지 하며 올라간다.
탁 트인 조망에 눈은 시원하지만 그늘이 없어 땀이 난다.
뜨거운 태양을 마주하며 무념무상으로 걷다 보니 문득 날개가 녹아내릴 걸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더 높이 날아오르고 싶어했던 이카로스의 욕망이 이러했을까 싶어진다.

통천문도 지나고, 슬슬 시야에 고사목이 늘어가고, 한두 번 철봉도 타고나니 드디어 천왕봉이다.
평일인데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걱정보다 한산한 정상부에서 굽이굽이 펼쳐진 산그리메를 내려다보며 지금 이 순간만은 천하가 내 발아래 있구나 싶어지며 한껏 성취감을 만끽한다.
이제 천왕봉은 찍었으니 등린이는 졸업이라는 친구의 말에 더욱 어깨가 으쓱하다.

오를 만큼 올랐으니 이제는 다시 내려가야 할 시간.
악명높은 중산리 하산길에 걱정이 앞서지만 무릎보호대를 단단히 장착하고 스틱도 손에 꼭 쥐고 출발.
하지만 예상보다도 더 고된 하산길에 금세 기운이 빠진다.
끝도 없는 돌밭 너덜길에 급기야 무릎 위쪽이 아파오고 얼른 소염진통제를 한 알 삼킨다.
작년 한라산 관음사 하산길의 악몽이 떠오르며 계속 같은 길을 걷는 기분이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는 말을 되새기며 걷고 또 걷다 보니 로터리 대피소에 도착했다.

법계사 버스 시간표와 남은 거리를 계산해보니 빠듯하게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아 버스 기사님께 미리 전화를 드리고 힘을 내서 다시 하산.
등력이 좋은 일행들이 먼저 가서 버스를 잡고 있겠다며 서두르고 지리산 초짜인 나는 최대한 뒤처지지 않으려 일행을 시야에 놓치지 않는 정도로 열심히 따라붙는다.
계곡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땅으로 내려온 듯도 한데 내공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지 어느새 일행은 시야에서도 보이지 않고 버스 시간에 쫓기는 마음에 시계만 계속 들여다보며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뭔가 차 소리가 들리는 듯 해 다다닥 뛰며 친구 이름을 부르는데 지나치는 버스와 허무한 듯한 일행들.
알고 보니 기사 아저씨가 1분도 안 기다려주고 가버리셨고 그 버스 뒤꽁무니를 내가 본 것이다.
내가 정확히 언제 올지 몰라서 차마 버스를 붙잡지도 못하고 그래도 의리넘치게 나를 기다려준 일행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무릎이 부서지더라도 뛸 걸 그랬나 내심 후회되는데 오히려 일행들이 괜찮다며 버스길로 걸어가면 된다고 먼저 말해준다.
버스를 안 탈 계획이었다면 칼바위로 더 짧게 하산할 수도 있었는데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더 걷게 된 셈이지만 서울까지 가려면 1시간 10분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3km 버스길을 걷기 시작한다.
질러내려가도 될 것 같은 내리막을 안전한 운전을 위해 긴 S자로 굽이굽이 둘러놓은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걷는다.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걷다 보니 이미 지친 발이 더 빨리 지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종착지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희망 하나로 걷고 또 걷다 보니 드디어 중산리 탐방센터가 보인다.
차에서 간단히 양말과 신발을 갈아신으니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지만 바로 아래 중산리 계곡에서 잠시 지친 다리를 식혀주기로 한다.
시리도록 찬 계곡물에 다리를 담그고 나니 세상 시름이 잊히는 기분이다.

예상보다 늦어진 시간에 배가 고프긴 했지만 그래도 들렀다가기 참 잘했다 싶었다.
열심히 검색한 끝에 늦은 점심은 우렁쌈밥으로 결정.
차로 15분 이동해 식당에 도착하니 깔끔한 황토방 느낌의 방으로 안내된다.
여러 쌈채와 흑돼지 불고기 외에도 각종 밑반찬이 너무 맛있어서 계속계속 먹다 보니 한 공기로는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다시 서울로 먼길 가야 하니 무리한 식사는 자제하기로 한다 (우엉연근차 넘나 좋음!).

마지막 식사까지 흐뭇하게 마무리하고 이제는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가야 할 시간.
크나큰 지리산이다 보니 돌아가는 길도 굽이굽이 지리산 자락을 끼고도는 느낌이라 한참을 더 지리산의 여운을 누릴 수 있었다.
모든 산이 그렇지만 내가 다녀온 산을 다시 보았을 때는 가보기 전과는 느낌이 완전 달라진다.
남녘의 많은 산에서 멀리서나마 올려다보이는 지리산은 이제 보일 때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이치를 깨닫게 해 주어 어리석은 사람도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지리산(智異山).
지리산에서 하룻밤까지 자고 왔으니 나의 지혜로움이 한 뼘이라도 자랐기를 바라본다.


[요약]
1. 코스
Day1 거림 - 세석 대피소
Day2 세석 대피소 - 촛대봉 - 세석평전 - 연하선경 - 장터목 대피소 - 천왕봉 - 로터리 대피소 - 중산리
2. 기온: 14/32 (산청기준, 일출산행시 그리 춥지 않았음)
3. 착장
Day 1 반팔티 + 춘하바지
Day 2 안다르 메쉬집업, 아톰lt/토렌쉘(일출) + 컬럼비아 레깅스, 하이크바이브 니삭스
4. 기타 준비물: 헤드랜턴, 물통, 침낭, 샤워티슈, 귀마개
5. 장점: 대피소 1박이 주는 여유로움, 지리산의 별구경과 일출
6. 단점: 중산리 코스 하산은 아직 내 수준에는 무리
7. 다음 방문 계획: 등력을 더 키워서 돌아오마!

[별점]
1. 난이도: 5 (천왕봉-중산리 하산길은 지도상에도 검정색 구간임)
2. 풍경: 4.5 (또렷한 일출, 바다가 보이는 조망까지는 아니었지만 날이 화창해서 좋았음)
3. 추천: 4.0

[오늘의 교훈]
1. 이고지고 가는 짐은 본인 능력치에 맞게 적당히 지고, 배낭은 본인 몸에 꼭 맞게 제대로 매야 한다.

(삼겹살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몫, 만약 선택한다면 초벌된 삼겹살 강추)
2. 대피소 예약과 탐방로 예약은 별개임
3. 여름 산행의 가장 큰 적은 날벌레와 자외선 ㅠ

4. 대피소 필수템: 귀마개, 샤워티슈, 반바지

무쓸모템: 침낭(일출용 패딩만 덮어도 됨)

매거진의 이전글 [20220514-15] 15. 황석산 & 황매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