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주혜 Nov 04. 2023

훌륭한 예외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세계관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 나아가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거나 절망하는 이야기의 짜임새를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나는 작가들의 이런 능력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과연 그 능력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이며 어떻게 자란 것일까.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이런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능력에 대해 집중하고 파고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차이가 아니었을까. (나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작가가 아닌 모든 일이 그렇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느냐를 결정짓는 요소는 환경이 아닌 개인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결심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믿는다.) 물론 세상에는 예외적으로 놀라운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나는 예술의 영역은 그런 면에서 조금 특별하다고 보는데, 예술을 예술로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사람일까 싶을 정도의 감탄이 저절로 생긴다. 인간이 가진 이 예술성, 특별한 감수성, 놀라운 이성적 판단 능력이 결국엔 우리가 오늘날 절망하고 있는 현실을 구해 낼 수 있는 수단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인간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 절망을 경험한다고 생각하지만 또다시 인간으로 인해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예술성과 감수성, 그리고 자신이 삶으로 켜켜이 쌓아 올린 정서를 가지고 오늘날의 끔찍한 세상을 돌이킬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개개인이 가진 능력대로 인간은 서로를 위해 구원에 동참해야겠다는 필요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먼저 우리 각자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것을 해 나아가는 것이 곧 서로를 위한 구원이라 믿는데, 이 구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최근 읽고 있는 책 <소피의 세계>에서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정확히 말해서 철학 문제는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될 수는 없어. 대부분이 일상생활에 쫓겨서 각기 다른 이유로 삶에 대한 경이감을 잃어버려. (이들은 토끼 가죽 털 깊숙이 기어 들어가 편안히 자리 잡고는 여생을 거기에서 보내지.) 
    어린아이에겐 세계와 그 안의 모든 것이 놀랍도록 신기한 새로움으로 다가와.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지 않아.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 세계를 완전히 평범한 것으로 체험하지. 
    바로 이 점 때문에 철학자라는 훌륭한 예외가 생겨나는 거야. 철학자는 절대로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 남자든 여자든 철학자에게 이 세계는 언제나 이해하기 어렵고 수수께끼 같은 신비한 세계인 거야. 철학자와 어린이는 이처럼 중요한 공통점이 있어. 철학자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 같은 감수성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지."


나는 종종 나의 글쓰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인간에게서 버려진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쓸 거야, 이 글은 결국엔 사람을 위한 글이 될 거야.'라고 말이다. 나아가 조금 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상대방에게는 덧붙여 말한다. '한평생 하늘을 보지 못한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쓸 거야, 자신이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인지하지 못하고 오직 인간에 의해 죽기 위해 태어난 채로 살아가는 동물들의 삶을 찾아다닐 거야.' 나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딱 두 가지의 반응이다. '멋있고, 대단하다'거나 '그게 뭐야? 동물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하는 식의 답변이다. 사실 나는 두 가지의 반응 모두 석연찮다. 상대방의 가치판단이 나의 글쓰기 앞에 세워진 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나를 응원하거나 누군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다른 답변을 듣고 나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이 두 가지의 답변을 같은 정서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상대방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동물을 위한 글쓰기, 그것이 곧 사람을 위한 글쓰기가 될 거야, '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너의 일이니,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라는 식으로 다가오는 답변이 아닌 너와 그 생각을 함께하겠다는 지지와 응원을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시작하면서 더욱더 외로워졌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기로 한 다음날부터 나의 여정은 오롯이 혼자만의 여정인 것만 같았다. 내 주변에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어서가 아니다. 동물을 위하거나 사람을 혐오하거나 사람이 만든 문명의 시스템을 버리고 싶지 않거나 동물을 물건으로 생각하거나 사람과 동물의 존재를 다르게 여기거나 때론 너무 동일하게 여기거나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가치관의 혼재 속에서 진지하고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삶에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논쟁이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숫자는 매우 적으며 사람들의 외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늘도 동물들은 말없이 아프거나 죽임을 당할 뿐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속수무책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나의 글쓰기를 조금 더 탄탄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또다시 절망한다. 과연 이 일들이 소용 있을까.


나 스스로 나를 어떤 한 분야의 고고한 철학자라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나라는 존재를 인간과 동물이 살아가는 이 지구에 함께 공존하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그 명확함 때문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회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 괴로운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분명한 일인 것을 알고 있다. 이 명확함이 어쩌면 이 고루한 외침을 계속하는 이유가 되겠다. 어떤 생명이든 함께 썩어갈 존재로 태어난 내가 누군가에게, 어느 이름 모를 생명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필요를 찾아 필요 없는 일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은 나의 일상은 소리 없는 전쟁과도 같다. 이럴 때 오래도록 변하지 않고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영감이 되는 문학작품은 나를 위로한다. 변함없이 주어진 환경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동물들과 소외된 사람들은 나의 괴로움의 필요를 생각하게 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전쟁이 분명히 있지만 이를 조금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려는 누군가의 노력들은 나를 겸손하게 한다. 오늘도 슬픈 날들의 하늘인 것만 같은 세상은 때론 고요하게, 때론 폭풍우처럼 몰아치며 나에게 조금 더 나아가라 말한다. 나의 필요를 저 먼 나라 어디에 있는 작은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이기를 바란다. 조금 더 원한다면 동물들의 눈빛을 생명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동물을 위한 글들이 결국에 인간을 위한 글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영위해야 할 세상에 대해 글을 쓰노라면 결국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살아가야 하고 죽음을 향해 가야 하는 모든 여정을 생각하는 글쓰기일 텐데, 한 생이 살아감에 있어서 그 생을 둘러싼 또 다른 생명들의 존재를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생에 대하여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순간을 포착하거나 무엇인가로 남긴다는 것은 생을 둘러싼 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아주 기초적인 이 생각을 망각할 때가 많아 스스로가 세상의 주인이 되려 하거나 나의 삶을 다른 이들이 방해하는 등의 관심을 죽도록 싫어하기도 하는데, 변함없는 사실은 내 인생의 내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생의 생들도 각자의 주인공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생을 얼마나 침범하며 살아가는가. 그저 존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생의 다양한 단편들을 그 누가 획일화 시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친절한 목소리로부터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루한 철학자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상과 당장에 쓸모없는 일들을 반복하는 이유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진짜 세상을 자꾸만 마주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눈을 가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어떤 날은 내 모습에 괴롭다가 어떤 날은 지금 당장에 예외인 세상이 언젠가 소소한 날들이길 바라며 나의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내 옆에 존재로 충만한 동물은 여전히 말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