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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Nov 08. 2023

유해하다는 착각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내가 처음 개와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잠을 잤던 건 호주에서였다. 여중생시절 여름방학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연수를 받는 동안 나는 한 가정집에서 홈스테이를 했었다. 친절한 집주인과 자녀들, 그리고 함께 사는 반려견들과의 일주일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함께 먹고 자면서 나는 짧은 시간 그들과 친해졌다. 그들은 저 먼 나라 한국에서 온 나를 따뜻하게 대해줬고 내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먹는 것이 힘들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줬다. 그들의 착한 마음씨는 언제고 어느 때고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크고 작은 배려들 속에서 알아차렸고 덕분에 지금까지 호주는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개였다. 단독 주택이었던 그 집은 앞뒤로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마당에는 개들이 언제고 어느 때고 돌아다녔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약  5마리 정도였던 것 같다. 크기도 색깔도 다양했다. 나는 동물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서 개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개들이 마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개들과 한 공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기도 했는데, 나는 그런 광경이 어색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는 동물을 밖에서만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개. 창고 끝에 위치한 개집에 있는 개. 이렇게 사람과 개가 머물러야 할 공간은 따로였기 때문이다.


호주에서의 첫날, 집주인아저씨는 예쁜 마당에서 스튜를 끓이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야외테이블을 예쁘게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환영하기 위한 자리였다. 모든 가족구성원들과 과 함께 나는 마당에서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를 즐겼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장면들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날의 온기와 사람들의 표정이 기억난다.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춥지 않았다.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따뜻함이 채워졌던 느낌이 생생하다. 나는 아저씨가 직접 끓인 스튜를 한 접시 먹으려는데 그 집에서 가장 큰 개가 내 옆에 왔다. 내가 들고 있던 그릇을 코로 툭 치더니 옆에 앉았다. 나는 당황했고 당황한 내 표정을 본 가족들은 미소를 지어보았다. 이 큰 개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던 아주머니는 내가 이 개와 조금 더 친해지기를 바란다고 했고 나는 '개의 말'을 해석하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문제는 그날 저녁이었다. 오랜 비행이었고 낯선 환경에 조금은 긴장했던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호주에서의 모든 날들이 걱정되면서도 기대됐고, 사실 그런 생각보다 배가 너무 불러 저절로 더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나는 깜짝 놀랐다. 개가 내 옆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깜짝 놀라며 거실로 나온 바람에 개도 놀라고 사람도 놀라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는 온종일 그 이야기를 하게 됐다. '개와 같이 잠을 잔 이야기.' 그때 쓴 나의 일기장에도 딱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개가 내 옆에 있었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곳, 개가 있어야 할 곳에 대하여 명확히 구분 지었던 나에게 그날의 경험은 꽤 충격이었다. 개가 사람의 공간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했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개와 함께하는 생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그동안 어른들은 말했다. 내가 동물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에이, 지지!' 어쩌다가 동물들의 몸을 쓰다듬어주면. '얼른 손 씻고! 절대 얼굴 만지지 말고!' 동물은 더럽고 유해한 존재였던 거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너른 밭에서 자라는 채소와 과일이 밖에 있어서 더러운 것이라면 깨끗하게 씻어서 먹으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온 거리를 헤매다가 사람의 곁에 다가온 동물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그들을 왜 피하려고만 했을까.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조금 더 세심하게 살핀 뒤에 언제든 곁에서 만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나는 동물을 조금 더 인간과 가까운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호주에서의 그날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도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 많이 익숙해져 있다. 개가 사람의 공간에 들어가고 어떤 곳에서는 고양이가 사람이 사는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들을 위한 사회적 공공장소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아직도 동물에 대하여 더러운 존재,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결국에 사람의 생각이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를 결정하는 셈인데, 동물이 다닐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하여 동물의 입장이나 환경, 본능 등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동물은 어디에 있기를 원하는가.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총 동원하여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동물은 그저 인간의 유희로 사용되거나 인간의 필요에 의한 장소에 머물 것이다. 인간이 동물의 탄생과 생명의 연속성에 대해 파괴하기만 할 뿐 그들의 생존에 관여하거나 생명으로 존중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동물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동물을 인간의 필요로 대하는 일에 대하여 당위성과 합당함이 존재하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생명의 탄생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면 쉽게 나올 수 있는 결론이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 어떤 생명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의미인데 만약 그것이 오늘날의 생명과학으로 가능한 일일지라도 그렇게 태어난 생명에 대하여서는 생명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가 그렇다. 나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자신이 의도해 태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기 위해 생을 채워나간다. 존재하는 이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얻어지는 결핍, 즉 내 의도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내가 생을 완성하기 위한 '나만의 의도'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를 어떻게 채워나가야 하는가라는 부분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 고민이 마침내 완성되는 철학자가 있을지 몰라도 모든 이들이 확실한 정답을 쥔 채로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길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우리 생에 대한 의도를 끊임없이 탐구하려 할 때 다른 생에 대한 감수성을 저절로 떠올릴 수 있으며 이는 서로의 생에 대해 존중하는 방향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고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동물들의 생에 대하여 인간이 속단하며 판단했던 모든 부분에 대해 다시금 새롭게 적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어떤 생도 창조할 수 없으며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 생이 영위되는 부분에 대해 인간이 기계를 다루듯 다룰 수는 없다는 의미다. 하고 싶은 것과 가고 싶은 곳이라 불리는 모든 것. 즉 '원하는 바'가 있는 생에 대하여 그 누가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서로의 생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모든 생에게 '영위'가 가능하다는 조건을 달아 끊임없이 타인과 다른 존재에 대한 생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고민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모두가 동일하게 마주한 던져진 생에 대하여 따스한 시선이 남을 것이다.


지금 나는 동물과 함께하는 공간에 대하여 거부감이 없다. 인간이 그토록 고수했던 깨끗한 존재라는 인식이 그 자체로 치우친 생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를 과학적으로 어떤 존재에게 균이 더 많은가, 하는 문제로 접근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음압병동에 격리되는 것에 대한 부분에 대해 논쟁해 보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인 동물에 대하여 그들이 머물러야 할 장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특권이다. 인간에게는 동물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도 동물이 원하는 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동물들은 그들의 세상을 위해 인간의 삶을 위협한 적이 없으며 인간이 인간 이하의 어떤 존재로 전락하기를 원한 적도 없었다. 이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인간이며 인간이 동물과 함께하는 삶에 대하여 진정으로 고민하고 인간을 위한 환경이 아닌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임을 말해두고 싶다.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지구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동물 애호가가 되어야 한다거나, 반려인이 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최소한의 본질적인 고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인간과 다른 존재가 유해하다는 착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가. 그것은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지금의 것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인간으로 탄생된 순간에 대하여,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그 종착지에 대하여 생각할 때 비로소 명확하고도 단순한 뻔한 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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