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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Nov 28. 2023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우리는 과연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모든 인간관계와 생명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는 동안 우리 안에 두려움은 어딘가 머물러 있다. 두려움의 끝에 나는 생각한다. 관계의 앞으로 더욱더 나아갈 것인가. 이대로 뻗어나가기를 멈추고 나의 생을 만족하며 살 것인가. 잠깐의 만족으로는 분명 후자가 좋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국에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더 나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왜 우리는 나아가야 하는가. 나는 종종 동물을 인간 삶의 '부수적인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 세속적 기사, 이와 같은 정서가 바탕이 되어 만들어지는 다양한 콘텐츠들을 마주한다. 당장에 나의 삶에 불편함이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이야기들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언제나 부수적인 존재들로 전락한 이들의 생이 신경 쓰인다. 내 생각의 근원을 따라가 보았다. 나는 왜 이것이 불편할까. 아마도 그것은 '마음의 윤리학'을 따른 칸트의 말처럼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한 내가 과연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이해하고 그 반복되는 법칙을 따르며(그 법칙이 윤리적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논지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고민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놓자면, 나는 내가 얼마든지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법칙과 틀 안에 존재할 때 비로소 자유하다고 느낀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넘지 않아야 할 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허용하고 모든 것을 용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경우와 같다. 인간은 때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세상을 마치 자연법칙이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회귀하는 방법을 몰라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는데 앞으로 나아가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수많은 문제점들이 생겼다. 이제는 보다 민첩하게 이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되돌아보는 노력이란 본래의 생의 모습으로 가닿는 노력과 같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유는 이미 방대하지만 멈춰야 하고 되돌아봐야 하고 때로는 뒤로 돌아가야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토론의 열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나아가는 것을 멈춰야 하는가. 나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대해 인간이 인간과 전혀 다른 연결고리가 있다고 여기며 전혀 다른 생이라고 취급하는 것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본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유한함, 특히 인간 사회가 스스로를 고립하며 형성한 시각화된 사회가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얼마나 지협적인 생을 영위하는가를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가 앞으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타인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대하여 또 다른 생과 우주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의 모습이 전부라 여기며 살아간다. 어쩌면 유한한 인간의 전형적인 생존의 방법일 수 있겠다. 각자의 트루먼쇼를 영위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생은 동물에 대한 생을 돌아보거나 생명에 대한 시선을 넓히는 일에 대해 무감각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복해 왔다. 모든 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스스로는 결코 완벽히 알지 못하며 언제 떠날 수 있을지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이 이토록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지 않는다면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지구의 수많은 생명에 대해 시선을 돌릴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이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간은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다. 또 이를 다양한 언어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류의 위대함이다. 대부분의 이런 시선이 조금 더 인간을 위한 방향성이 아닌 인간이 아닌 존재와 나아가 지구를 위한 생각으로 뻗어나간다면 어쩌면 우리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을 대다수가 전면 수정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생명으로 우리는 동일하게 귀엽다. 예쁘고 아름답거나 멋지다는 말은 한 때 화려하게 쓰일 수 있지만 나는 귀엽다는 형용사가 질리지 않는다. 귀여운 것은 언제나 귀엽다. 새롭게 귀엽고 계속해서 귀여울 수 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귀여움의 전제는 '사랑스러운'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다. 인위적이거나 의도가 있거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형체가 아닌 귀여운 것들은 있는 그대로 본래 귀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귀여운 대상을 보며 어떤 의도를 파악하려 하거나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귀여울 수 있는 것이 귀여움이다. 인간과 전혀 다르게 생긴 동물들이 귀여운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있을 뿐 어떤 목적이나 술수 같은 것들을 동물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생명으로 존재할 뿐이다. 신기한 것은 인간에게도 이런 모습은 존재한다. 사회 안에 깊이 들어와 사고하고 인간사의 질서를 조금 더 쉬운 길로 가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왔을 때 인간이 만든 지옥으로 빠질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본래 귀여운 생명이다. 인간은 왜 동물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가. 그들의 생에 대하여 왜 이토록 관심을 갖고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하는가. 단순히 말하지 못하는 동물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동일하게 귀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 특별하거나 더 위대하거나 무엇인가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라는 전제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권한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수단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그 가치에 대해 언제나 놀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 대해 생각의 지평을 열어가는 과정이 즐겁다. 이 즐거운 과정은 놀라운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함과 동시에 무능력함을 만난다. 우리는 생명으로 공존하지 않고서 그 어떤 특별한 존재도 될 수 없다. 언젠가 나는 말했다. 돌고 도는 인생이란 없다고 말이다. 과연 인간의 생이 그저 돌고 도는 인생이었던가. 나는 아무리 돌아보아도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확장하려 하고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려고만 했다. 그래서 실제로 인간은 인간만을 위한 문명을 만들어냈고 생명으로 존재하는 가치들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바는 돌고 도는 인생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라진 사람들의 투쟁이 슬프기만 하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봐야 생의 끝은 누구나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물들을 위한 글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쓰다 보니 그것은 결국 인간은 위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인간과 동물이 그리고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지구가 조금 더 생으로 존재하는 가치에 대해 인정한다면 우리는 더 나아가지 않아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에게 속절없이 굴복하여 슬픈 눈으로 생을 마감하는 동물들의 모습을 본다. 과연 이것이 어쩔 수 없는 동물의 생으로만 여길 수 있는 문제인가. 생명으로 동일하게 귀여운 모든 것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춰 서서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해야 할 때다.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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