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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엔터 Sep 10. 2023

학대의 기억이 문득 떠오르더라도…우린 괜찮아질 수 있어

우당탕탕 귤엔터 9화 폭력의 마당에 매여 있는 모두에게


온주까지 반려견 데뷔에 성공하고 나서 개들이 모두 떠난 마당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 홀로 방문했던 적이 있다. 늘 개들이 반겨주던 쓰레기더미 마당은 고요하기만 했고,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문득 미국에 있는 온주, 베르, 포멜론의 가족은 아이들이 지내던 환경이 궁금해도 찾아오기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마당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피아노 자리가 온주가 묶여 있던 자리예요. 이쪽에 조생이랑 자몽이가 묶여있었고, 자몽이는 여기 이 기둥에 줄이 꼬여 목이 졸린 채 발견된 적도 있었고요.” 언젠가 이 공간도 사라지면 이제 우리의 증언으로만 남아있을 기억들. 촬영을 마치고 나는 온주가 묶여 있던 목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공간을 떠난 개들이 이곳에서의 일을 기억할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설령 삶 안에서 이따금씩 떠오르더라도 행복한 일상으로 덮여 금방 괜찮아지기를 바랐다. 마당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온주는 언제나 쓰다듬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굴곤 했다. 그런 온주를 볼 때마다 나는 감추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없던 일처럼 잊어버린 채 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그래도 온주는 앞으로 가족과 살면서 자신을 향한 모든 손길이 폭력이 아니라 애정의 표현이라는 걸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떨까? 마당을 떠난 개들이 괜찮아졌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면서도, 정작 나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들이 모두 떠난 마당에 홀로 남아서야 내가 어떤 기억에 매여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개들이 겪은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에 대해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달음질치고 싶었던 기억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구조 전 온주가 목줄에 묶인 채 방치됐던 공간


그날은 부모님을 따라 동생과 함께 시장에 갔던 날이었다. 부모님이 청소용품 코너에서 물건을 집어 들자 동생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들고 간 빗자루가 너무 딱딱해 보여서 겁이 난다고 속삭였다. 나는 그 순간에도 그 말을 부모님이 들을까 두려워 동생 손을 잡고 자리를 벗어났다. 우리는 집에 딱딱한 물건들, 그러니까 빗자루, 연탄집게, 대걸레 같은 것들이 늘어나는 것이 두려웠다. 부모님의 기분을 거스르는 순간 그것이 체벌 기구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겨놓거나 망가트리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기분이 나빠 보이면 최대한 기분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즐거운 척 말해보곤 했다. 그것도 소용없을 것 같으면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린 나에겐 부모님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어느 날은 호빵을 데우다 태웠던가. 다가올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나는 전속력으로 동네를 가로지르며 뛰었다. 부모님이 쫓아오는지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대로 땅에 넘어졌고 도망간 괘씸죄까지 합쳐져 동네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발로 밟혔다. 부모님은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사라졌고 나는 일어나 먼지를 털고 밟힌 발목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발목이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어르신들이 혀를 차며 “또 혼났냐”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날은 음표를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른손을 맞았다. 틀릴 때마다 맞은 손이 부어 연필이 쥐어지지 않아 못하겠다고 하자 그다음은 머리였다. 마침내 음표를 그릴 수 있게 되어서야 불룩해진 머리와 손등으로 동네 아이들과 놀기 위해 나갔다. 친구들은 “또 혼났냐”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부모님의 싸움이 커져 어느 날은 경찰이 출동했다. 그들은 “싸우지 말고 잘 해결하라”라고 말하곤 돌아갔다. 어렸지만 나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점차 배워갔다. 온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훈육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 마을이 그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던 셈이다.


감귤이는 마당에 지낼 때부터 묶여 있는 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까지 멀리 가 참았던 배변을 한 번에 쏟아내곤 했다. 마당을 벗어나서도 배변 자리를 찾는 데 오래 걸렸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신중하게 배변을 하고 싶어 했다. 낯선 곳에서는 더욱 심해서, 지난번 제주에서 배를 타고 완도를 거쳐 서울에 왔던 때에는 제주에서 배변을 한 뒤 사흘 동안 소변조차 보지 않아 애를 태우게 했다. 사실은 나도 어린 시절 거실에 나가면 괜한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 화장실 가는 것을 참았던 기억이 있다. 최대한 물을 적게 마셨고, 모두 잠이 들면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다. 감귤이가 마당에 배변을 해 더럽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며 묶여 있는 감귤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혼나지 않기 위하여 꼬리를 흔들며 몸을 숨기려고 했을 것 같다. 개들이 묶여 지냈던 마당은 길목에 위치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호의적인 사람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개들은 우리를 기쁘게 반기다가도 배변을 치우기 위하여 빗자루를 들면 무서워 겁을 먹고 몸을 숨겼다. 마당 주민들과 언성을 높일 때면 납작 엎드려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듯이 눈치를 보기도 했다. 자신의 무고함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가만히 꼬리를 흔들며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볼 때면, 말하지 않아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어느 지역이건 도심을 벗어나 걷다 보면 마당이나 밭에 묶여 있는 개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그 개들은 교외나 시골 마을의 흔한 풍경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자연스러운 시골 마을의 풍경,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당연한 모습 안에 우리의 암묵적 동의가 있다. 저 동물들은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우리의 합의 안에서 그들의 폭력적인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합의의 결과로 그들은 병에 걸리고 아프고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먹고 자는 자리에서 배변하고 재해를 피하지 못한 채 1m 반경에서 짧은 생을 살다 죽는다.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방치됐다가 구조된 성견 온주는 현재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새 삶을 살고 있다. 지난 여름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온주와 제주 해변을 산책했다.


아동을 학대하는 부모와 동물을 학대하는 보호자의 가장 큰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동과 동물을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점일 것이다. 자신이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즉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기분이 나쁘면 내 물건을 집어던져도 되는 것과 같은 논리로, 자신의 기분에 따라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동학대와 동물학대는 완전히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어린 시절 나에게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던 체벌은 대부분 부모님의 분이 풀릴 때야 끝이 났다. 당시에 나는 그들이 주는 것을 먹고 자라나는 동안 그 분풀이는 마땅히 견뎌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사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부모님의 고단한 삶을 변명하고 싶은 마음과, 그땐 다 그렇게 키웠다는 생각, 그리고 나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 경험을 폭력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당의 개들을 보며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개들이 겪는 것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뿐인 개들이 사람들의 분풀이 대상으로 취급받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라고 생각됐다. 삶의 중요한 결정권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존재에게 감정적으로 대할 권한이 있다는 착각은 어떻게 주어진 것일까?


작년에 금배와 함께 초등학교 앞을 산책하다 ‘훈육을 위해 한 대만 때리는 것도 아동학대입니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보고 매우 놀랐다. 세상이 변했구나.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했다. 이것을 합의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야만 했을까? 그동안 아동학대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할 때면, 피해 사실에 대한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가 주를 이루어 듣기조차 괴로운 순간이 많았다. 인간성을 상실한 듯한 희대의 악인이 자행한 일이어야만 비로소 잘못을 논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 같았고, 그것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학대의 수위가 상식을 벗어나야만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인가? 왜 폭력 그 자체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걸까? 한 대만 때리는 것도 학대라는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죽었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어린이,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지난한 합의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말도 안 되는 천인공노할 방식으로 죽어야만 이 또한 폭력이라고 인정될지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죽음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그저 살아있는 존재가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모든 상황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합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기 위해서 이제 나의 기억으로만 남은 마당에서 개들이 겪은 일과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마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하고 싶었다. 이 마당은 비었지만 수많은 존재들이 비슷한 마당에서 삶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의 마당에 매여 있는 모두가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증언을 마친다.


미국 일리노이에서 가족들과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온주 (사진 제공=온주 보호자님, 인스타그램 @doggofsfc )



▶ 귤엔터 이사진 : 구낙현·김윤영·금배

MBTI가 ENFP인 사람, INTJ인 사람, 그리고 말이 없는 강아지 금배로 이루어진 팀이다. 매일 산책하는 금배와 더 행복하게 걷기 위해 최근 제주로 이주했다. 걷다가 만난 마당개와 들개의 새끼들을 길거리캐스팅하며 ‘제주탠져린즈’라는 반려견 연습생 그룹을 꾸렸다. 지금은 이들의 소속사 귤엔터로서 반려견으로 데뷔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강아지 금배와 걸으며 만난 제주의 자연과 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한다.



※ 이 글은 2022.10.21 경향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9231607015?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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